KIEAE Journal
[ Research Article ]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The Korea Institute of Ecological Architecture and Environment - Vol. 24, No. 6, pp.77-89
ISSN: 2288-968X (Print) 2288-9698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1 Dec 2024
Received 25 Nov 2024 Revised 05 Dec 2024 Accepted 11 Dec 2024
DOI: https://doi.org/10.12813/kieae.2024.24.6.077

카나가와현 발굴 유구를 통해 본 일본 원시시대 수혈주거의 시대적 변화

백승관* ; 김영훈**
The Periodical Changes in Japan's Primitive Pit Dwellings through Excavations in Kanagawa Prefecture
Seung-Kwan Baek* ; Young-Hoon Kim**
*Main author, Assistant Professor, Dept. of Architecture, Cheongju Univ., South Korea backguy100@cju.ac.kr
**Corresponding author, Professor, Dept. of Architectural Engineering, Daejin Univ., South Korea kymyh@daej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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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Purpose:

Focusing on the remains of pit dwellings in Kanagawa Prefecture, where pit dwellings from the Jomon period to the Kofun period have been excavated, we examines the changes in the spatial characteristics, structure, and form of pit dwellings, and through this, we will identify the intrinsic characteristics of Japanese residential architecture and the origins of general architecture.

Method:

Among the standard pit dwellings of the four-pillar type and similar examples, we have examined the excavations of pit dwellings of a eight sites in Kanagawa Prefecture from the Jomon period to the Kofun period. For this prior research on pit dwellings was consulted, and public excavation reports such as the “Kanagawa Prefecture Site Excavation Report” were referenced and cited for the remains of dwellings excavated in Kanagawa Prefecture.

Result:

It can be seen that the shape of floor plan and the main pillars form are changed to a rectangular plane in the last stage and the internal pillars are unified into 4 main columns. The scale of pit dwellings is showing a mix of small sizes of around 10 square meters, standard sizes of around 25 square meters, and medium-sized dwellings of 25 square meters or more. From the middle of the Yayoi period, the large scale of pit dwellings appeared, and then at the end of the Kofun period, the scale of pit dwellings began to decline due to the influx of flatland dwellings.

Keywords:

Pit Dwelling, Kanagawa Prefecture, Periodical Changes

키워드:

수혈주거, 카나가와현, 시대적 변화

1. 서론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일본의 원시주거 가운데 수혈주거(竪穴住居)는 구석기 말기부터 조몬(縄文)시대1)를 거쳐 무로마치(室町)시대나 에도(江戶)시대 초기까지 부분적으로 존속된 주거형태로서 일본 주거의 발전 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주거일뿐만 아니라 일본 주거의 원류성이나 지속성 및 그 안에 내재해 있는 일본의 주거 문화의 특징 등을 파악하는데 그 어떤 원시주거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주거라 할 수 있다.

수혈주거는 지면을 일정 부분 굴삭하여 지면을 주거의 바닥(床)면으로 하여 그 가운데에 4개 내지 7개 정도의 홋다테바시라(掘立柱)를 세워 보나 도리 및 서까래 등을 설치하고 그 상부에 갈대 같은 식물이나 흙으로 지붕을 덮는 반지하식 건축물을 말하며 수혈식 주거(竪穴式住居) 또는 수혈건물(竪穴建物)로도 불리고 있다. 수혈주거는 나무나 돌 등 주변에서 구하기 용이한 재료를 사용하고 수혈부의 측면을 벽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그 축조 방식이 간단하고 경제적이며 수혈로 인헤 형성되는 반지하 실내 공간도 습도나 온도가 일정 부분 적절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일본의 북동부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는 친환경적 기후 대응 주거 형태로 볼 수 있다.

하사미야마 유적(はさみ山遺跡)에서 발견된 주거상 유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1], 수혈주거의 존재는 이미 구석기 시대 말기부터 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수렵 채집을 위한 정착이 시작된 조몬 시대에 이르러 타나무카이하라 유적(田名向原遺跡) 등에서 발굴된 텐트형 평지주거를 대체하면서 일본 북동부 지역이나 관동지방 등 동일본(東日本)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기후 순응형 주거형식으로 자리하였다. 그 이후 야요이(弥生) 시대에 남방으로부터 고상건축(高床建物)의 전래되고 헤이안(平安) 시대에는 긴키(近畿) 지방 등에서 평상주거(平床住居)가 보급되는 등 주거 형식의 변화가 발생하였음에도 수혈주거는 일본 전역에 걸쳐 오랜 기간 동안 발생과 변화를 반복하면서 유지되어 온 주거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일본 원시주거 가운데 수혈주거가 주거 출현 최초 단계부터 근대 초기 혹은 오늘날까지 계속적으로 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주로 관동(関東) 지역 등 동일본(東日本)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조몬시대부터 고분시대까지의 원시시대 수혈주거 유구가 발굴된 카나가와현(神奈川県)의 각 시기별 대표적인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를 중심으로 수혈 주거의 평면 형상이나 구조 및 규모 등의 변화 내용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수혈주거로부터 파생된 일본 주거건축의 원류성 등 내재적 특성을 파악하기 위한 기초적 자료로 활용하고자 한다.

1.2. 연구의 범위 및 방법

본 연구는 수혈주거의 주거로서의 역사적 의미 및 후대의 일본 주거 건축에 대한 영향관계 등을 파악하기 위한 선행연구로, 일본 원시주거 가운데 주로 카나가와현(神奈川県) 지역에서 발굴된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를 통해 평면 형태의 변화 및 주주(主柱) 배치 형식 등 각 시기별 변화 과정이나 특징을 살펴보았으며 주요 연구 내용과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2장에서는 수혈주거의 일반적인 개요와 수혈주거의 구조 형식이나 주주 및 화로와의 관계 등 그 동안의 선행연구에서 밝혀진 유의미한 기초적 이론 등을 정리하였다.

3장에서는 특정 지역에서의 수혈주거의 시대적 변화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하여 바바와타우치야토 유적(馬場綿内谷遺跡) 등 조몬시대부터 고분시대까지의 각 시기별 유적이 복합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카나가와현 지역의 유적에서 발굴된 수혈주거 유구 가운데 가장 표준적인 수혈주거 형식인 4본주주(4本主柱)형식이나 이에 준하는 사례를 대상으로 각각의 평면 형태와 주주(主柱) 구성 형식 및 화로와의 관계 등을 살펴보았다.

4장에서는 3장의 분석 내용과 각 시기별 수혈주거에 대한 기존 연구 및 발굴 결과 등을 종합하여 주로 카나가와현 지역에서의 각 시기별 수혈주거의 평면 형태 변화와 주주 구성 형식 변화 등을 살펴보고 그 특징을 도출하였다.

연구의 시기적 범위는 수혈주거가 존재했던 원시시대에 한정하였으며 주로 일본 역사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에 따라 조몬시대, 야요이시대 및 고분(古墳)시대까지로 한정하였다. 원시주거의 한 부분인 구석기시대의 주거는 정주 문화라기보다는 수렵 및 채집을 위한 일종의 가(假) 가옥이었기 때문에 본 연구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를 제외하였다. 공간적 범위는 각 시기별 유적이 복합적으로 발견되고 당시의 유적이나 발굴 조사 기록이 존재하는 카나가와 지역에서 발굴된 수혈주거 유구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의 방법은 미야모토 나가지로(宮本 長二郎)의 ‘일본 원시 고대의 주거건축(日本原始古代の住居建築)’ 등 주로 수혈주거 관련 선행 연구를 참고하였으며 카나가와현 발굴 주거상 유구에 대해서는 카나가와 고고학재단 조사보고(かながわ考古學財團調査報告) 등 공공 발굴조사보고서를 참고 및 인용하였다.

본 연구는 주거로서의 수혈주거를 주요 연구대상으로 선정하고 있기 때문에 수혈 건축물 가운데 작업장이나 공동 제례 공간 등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축물은 본 연구의 범위에서 제외하고 있다.

1.3. 선행연구 검토

현재 국내 연구 가운데 수혈주거에 관한 연구는 김진철의 ‘삼국시대 타원형 수혈주거지 연구’(2009) 등 주로 국내 수혈주거에 한정되어 있으며 일본의 수혈주거에 관한 연구는 고영훈(1992)의 ‘한국과 일본의 원시주거 형태에 관한 연구(1)’라는 연구에서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기는 하나, 한국과 일본 수혈주거의 상관성 파악을 위한 지엽적인 내용에 머물고 있어 일본 수혈주거에 관한 심도있는 분석은 이루어지기 않고 있다. 최근 들어 김진모, 김영훈(2023)의 ‘일본 초기 원시주거에 대한 입지와 평면 규모 및 형상 분석-구석기 시대 말기와 죠몽 시대 초창기 유적을 중심으로’ 등의 연구 논문이 등장하고 있으나 그 내용이 원시시대 초기의 원시주거에 한정되어 있어 수혈주거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반면 일본의 경우 원시시대의 유적이나 주거상 유구가 본격적으로 발굴된 1960년대 이후부터 원시주거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이 가운데 수혈주거에 대한 연구는 코이데 요시하루(小出義治)의 ‘나라·헤이안 시대의 고고학적 연구-수혈주거의 계보와 그 복원적 고찰(奈良·平安時代の考古學的硏究-竪穴住居の系譜とその復原的考察)’(1983) 등과 같은 고고학 분야에서의 연구와 함께 구석기시대부터 고분시대까지의 원시주거를 총망라한 미야모토 나가지로(宮本 長二郎)의 ‘일본 원시 고대의 주거건축(日本原始古代の住居建築)’(1996) 등 원시주거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 서적 등이 이미 나타난 바 있다. 이밖에도 시부야 후미오(渋谷文雄)의 ‘수혈주거지의 소주혈 위치에 대하여(堅穴住居址の小柱穴位置について’(1998)나 쿠시하라 코이치(櫛原功一)의 ‘수혈주거의 유형과 계보-나가노현의 마시노신키리 유적의 분석(竪穴住居の類型と系譜-長野県增野新切遺跡の分析)’(2017) 및 시게후지 테루유키(重藤輝行)의 ‘고분시대의 4본주주 수혈주거와 도래인-키타큐슈 사례를 중심으로(古墳時代の4本主柱竪穴住居と渡來人-北部九州を事例として)’(2013) 등 전문적인 분야에 대한 연구 논문 등도 꾸준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연구들은 주로 특정 유적 발굴지나 주거상 유구를 통한 직접적인 유적 발굴이나 그것을 정리한 유적 보고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수혈주거의 평면 형태나 주주 배열 형식 등이 확인 기능한 실증적 연구로서의 가치가 있다.

이와 함께 ‘매장문화재 발굴조사 가이드라인(埋藏文化財発掘調査の手びき)’이나 나라 문화재 연구소(奈良文化財研究所)의 ‘전국 유적 총람’ 에 수록된 각 지역의 유적 발굴 보고서 및 카나가와 고고학 재단(かながわ考古学財団)에서 발간한 ‘카나가와 고고학 재단 조사보고(かながわ考古學財團調査報告)’ 등 각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학술재단의 유적 발굴 조사 보고서 등도 수혈주거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 가능하다.

본 연구는 상기 선행 연구 및 기존 발굴 보고서를 참고하면서 앞서 연구한 ‘일본 초기 원시주거에 대한 입지와 평면 규모 및 형상 분석’(2023)의 내용을 발전시켜 국내에서는 거의 다루고 있지 않은 일본 카나가와현 발굴 수혈주거를 중심으로 각 시기별 평면 형태나 주주 배열 형식 등 건축적 특징과 상관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이를 통해 주로 일본 동부 지역의 수혈주거 변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이는 향후 일본 주거 건축의 원형으로서의 수혈주거의 건축적 위상이나 특징 등을 살펴보는 후속 연구를 위한 기초적 연구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2. 수혈주거 일반적 개요 및 구조 형식

2.1. 수혈주거의 일반적 개요

앞서 언급한대로 수혈주거는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고분시대에 이르는 원시시대 전반에 걸쳐 홋카이도부터 큐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범위에서 출현했던[3] 대표적인 원시 주거 유형 가운데 하나이나 각 시기 및 각 지역별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 규모나 형상 및 내부 공간 구성 등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까지 각지에서 발굴된 초기 단계의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를 보면, 일반적으로는 지면으로부터 약 30cm-50cm 정도 파 내려가 복수의 벽주(壁柱)나 밤나무2) 등으로 만든 4-7개의 주주(主柱)와 지주에 보를 설치하고 서까래를 방사형으로 걸친 후 그 상부에 보온성이 있는 흙이나 통기성이 양호한 억새(茅)나 풀을 얹은 지붕을 설치하는 구조를 보이고 있다. 지붕재는 기후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홋카이도나 동북지방에서는 사계절 내내 흙을 덮었으며 관동 서쪽 지방에서는 야요이시대 후기 이후 초가 지붕(草葺き)이 보급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수혈주거가 전국적으로 방형 평면으로 통일된 것도 초가지붕의 보급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2]. 대형 수혈주거에는 벽면을 나무껍질이나 짚을 덮어 말뚝으로 고정하거나 혹은 널말뚝(矢板)으로 외양을 마감하는 예도 나타나고 있다.

수혈 부분의 깊이는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은 홋카이도(北海道)의 이챠니 카리카리우스(伊茶仁カリカリウス) 유적의 경우 깊이가 약 2m-2.5m에 이르는 주거상 유구가 발견되기도 하고 동경의 마에다코지 유적(前田耕地遺跡)이나 오사카의 하사미야마 유적(はさみ山遺跡) 같은 관동(関東)이나 관서(関西)지역의 수혈주거의 경우는 30cm 이하의 얕은 수혈 부분의 유구가 발견되기도 하는 등[1] 시기와 지역 및 건물의 용도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4]. 수혈주거는 일반적으로는 초석 없이 기둥을 지면에 박아 설치하는 이른바 홋다테바시라(堀立柱)를 사용하였으며 기둥의 부식을 막기 위해 목재의 끝부분을 불에 그을리거나 탄화시켜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 또한 각 부재의 길이에 맞추어 수혈 부분의 깊이를 조절하는 등 거주성과 내구성을 향상시키는 장치나 방법 등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2].

주거 내부의 평면 형태는 사각형 혹은 원형을 띠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며 벽이나 지붕 골조를 만들기 위한 수 개의 기둥 흔적인 주혈(柱穴)이 설치되어 있다. 수혈주거의 내부 공간은 초기에는 벽이나 공간 구분 없이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나, 야요이시대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효고(兵庫)현 고베(神戸)시의 타마즈타나카(玉津田中)유적 등에서 낮은 마루를 설치한 흔적이 발견된 것을 보면 후대에는 점차 침실과 창고 등이 분리되거나 혹은 남녀 간의 공간이 구분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3)

수혈주거 내부의 주요 시설로는 화로(炉), 저장혈(貯蔵穴), 도랑(周溝) 등을 들 수 있다. 화로(暖)는 일반적으로 출입구 맞은편의 거주 공간 중앙부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 설치되었으며 한 변이 약 0.7m-1.0m 정도의 크기4)와 10cm 정도의 깊이로 파서 상부에 용기를 올려 놓고 불을 지피는 단순한 형태가 대부분이다. 발굴된 수혈 주거 유적 복원에 따르면, 옥내 화로 형식은 지면에 설치하는 화로(地床炉), 주변에 작은 돌을 쌓아올려 설치된 화로(石囲炉),매장옹기 화로(埋甕炉) 및 돌로 둘러싼 매장 옹기 화로(石囲埋甕炉) 등의 형식이 나타나고 있다. 초기에는 지면 설치 화로가 주를 이루었으나 후대에 갈수록 돌을 쌓아 올린 방식이 중가하고 있다. 그러나 동북지방(東北地方)에서는 돌로 둘러싼 화로와 매장 옹기화로를 결합한 복합 형식이 발달하거나 홋카이도 등에서는 옥내 화로보다는 옥외 화로를 주로 사용하는 등 지역과 시기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야요이시대에는 주로 지상 화로(地床炉)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후 고분시대 전기까지 이어지다가 중기 이후 수혈주거 내부의 북측이나 동측에 화덕(竈, かまど)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대체된다[2]. 이 같은 불의 시용은 습도 조절만이 아니라 음식 제조와 식료의 보존은 물론 연기를 활용한 기둥 등 자재의 방충이나 부식 방지에도 효과적이었으며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지붕 상부에 간단한 환기구나 굴뚝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주거 내부에는 화로 이외에도 저장혈(貯蔵穴), 하수구(溝), 공방(工房) 등의 부속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며 시기나 지역에 따라 우메가메(埋甕), 석봉(石棒), 석단(石壇) 등의 종교적 유구가 부속되는 경우도 있다. 식품 등을 저장하는 저장혈은 조몬시대 및 야요이시대에는 주로 출입구 측에 설치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고분시대에는 아궁이가 출현하자 아궁이와 반대측 벽면의 중앙 혹은 구석 부분으로부터 점차 아궁이의 좌측이나 우측에 설치되고 있다. 수혈주거 주위에는 빗물 등이 주거 내로 침투하지 못하게 수혈 부분의 파 낸 흙을 활용하여 성토되어 있으며 내부에도 간단한 도랑(溝) 등의 유구가 발견되는 것을 보면 기본적인 배수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수혈주거의 배수처리시설로서 주구(周溝)는 주로 수혈 부분을 따라 설치되었으나 고온다습한 서일본 지역 같은 경우는 수혈 외측에 배수구를 설치되기도 하였다. 또한 저장혈이나 바닥 면 중앙의 피트도 저장혈로서의 기능과 함께 우수 배수용으로 사용되기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출입구는 조몬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주거의 장축선 상 한쪽에 화로를 배치하고 반대쪽에 1-2개의 입구 지주(入口支柱)에 의해 지지되는 출입구를 설치하였으며 입구측의 수혈 측벽에는 매장 옹기(埋甕) 등이 부속되고 있다. 건물 내부로의 출입구는 다른 부분에 비해 마루 바닥이 두껍게 설치되거나 혹은 입구 지주에 사다리 하단을 부착한 야요이시대의 수혈주거 유구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출입구에 작은 계단을 설치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홋카이도에서는 조몬시대 조기부터 전기, 관동지방에서는 조몬시대 중기부터 후기에 걸쳐 나타나는 손거울형 수혈주거의 돌출부도 출입구 시설로 추측되고 있다. 현존하는 유적이 없기 때문에 창문의 위치나 진출입 방법 등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기는 어려우나, 손 거울 모양의 청동 거울 등 고분시대에 출토된 유물을 보면 수혈식 주거에는 창이 설치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까지 발굴된 수혈주거의 규모가 한 변이나 직경이 2m-3m인 것부터 10m를 초과하는 규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정확한 규모나 거주 인원을 특정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으나, 주거보다는 공동생활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대형 수혈 건축물을 제외하고 보면, 일반적인 주거용 수혈 주거의 평균 면적은 약 20m2 전후로 4-5인 정도의 가족이 거주한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수혈주거가 번성하던 조몬시대는 기본적으로 모계 사회이고 남편이 밤에 아내의 처소에 방문하는 쯔마도이콘(妻問婚) 풍습에 따라 부부는 별도로 거주하며 그 자식들은 모친의 일족으로 양육되었기 때문에5) 수혈주거는 작게는 1-2인, 많게는 4-5인이 거주하는 공간 규모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2.2. 수혈주거의 구조 형식

수혈주거는 기둥이나 지벽(地壁) 등을 이용하여 지붕을 설치하는 방식에 따라 Fig. 1.과 같이 크게 후세야식(伏屋式)과 벽립식(壁立式)으로 구분되며 후세야식은 지면과 지붕의 위치관계 및 지붕 마감재 등에 따라 각각 후세야 A식과 후세야 B식, 후세야 C식 및 2단 후세야식(二段伏屋式)으로 세분할 수 있다.

Fig. 1.

Structural type of the pit dwelling

우선, 후세야 A식은 수혈의 측벽 하단부부터 수혈 벽면 중간부에 서까래 밑둥을 설치하여 지붕을 설치하고 그 상부에 흙을 덮는 형식으로 주로 홋카이도나 동북지방에서 나타나고 있다. 지붕의 하단부가 땅에 묻히는 형태로 인하여 지붕에 풀을 덮으면 빗물이 수혈 부분으로 새어 들어오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지붕을 흙으로 덮어 마감한다. 북방 민족의 경우 현존하는 사례는 존재하지 않으나, 흙으로 지붕 전체를 덮는 형식은 북방 민족의 수혈 주거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며 수혈주거의 원조 형태라 할 수 있다. 장점은 마룻대(棟)가 낮은 지붕 가구가 용이하며 흙을 두텁게 쌓아올릴 수 있기 때문에 추운 지역에 적합하나 실내 공간을 넓게 만들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주로 홋카이도나 동북부의 추운 지역에 한정되어 있으며 조몬시대 조기부터 전기에 축조되어 이후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6) 후세야 B식은 수혈벽 상단으로부터 수혈 외연부에 걸쳐 서까래 밑둥을 설치하여 지붕을 덮고 그 상부를 흙으로 덮는 형식을 말하며 후세야 C식은 축조 방법은 동일하나 지붕을 풀이나 갈대 등으로 덮는 형식을 말한다. 이 두 형식은 구석기시대부터 근세 전 시대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 조몬시대 중기에 성행 및 발전한 형식으로 볼 수 있다. 2단 후세야식(二段伏屋式)은 주주(主柱)를 경계로 보로부터 위의 작은 지붕에는 풀을 덮고 보의 아래부터 지면까지를 흙으로 덮은 형식을 말한다. 흙을 덮는 지붕형식으로부터 풀을 덮는 지붕형식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형식으로 볼 수 있으며 조몬시대 중기에 이미 형성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7)[2].

벽립식(壁立式)은 Fig. 1.에서와 같이 얇은 나무 기둥을 세워 벽으로 사용한 구조 형식으로 수혈의 측벽을 따라 측주(側柱) 혹은 벽지주(壁支柱, 壁柱)를 바닥면으로부터 지표면 위에 세워 측벽을 만들고 측벽 위에 보를 설치하여 지붕을 만드는 형식을 말한다. 외관상 홋다테바시라(掘立柱) 건물과 유사하나 지붕과 지면 사이에 벽이 보이는 구조라는 점에서 후세야식과 차이가 있다. 카고시마현 카쿠리야마 유적(加栗山遺跡)에서 발굴된 17개 동의 유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기적으로는 조몬시대 전기 전반부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으며8) 일정 기간 후세야식과 병용되었으나 조몬시대 중기 이후에는 거의 후세야식이 주류를 이루게 됨으로써 자취를 감추게 된다[2]. 벽식 수혈주거는 주로 일본해 연안지방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주거 형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몬시대 중기 말 혹은 후기부터는 동북(東北)지역이나 관동(関東)지역에서도 벽립식 수혈주거가 나타나게 된다.9) 야요이 및 고분시대에는 관동 지역 거점 취락의 대형 주거에도 벽립식 수혈주거가 나타나는데 주로 수장(首長) 저택의 권위를 나타내는 형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일반적으로 지붕의 형상은 후세야식(伏屋式)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벽립식은 특히 야요이시대 이후에는 집회소나 종교시설 등 대형 건축물에 나타나고 있다. 또한 수혈주거의 기둥 배치와 이에 따른 구조 형식은 벽주(壁柱) 형식, 대벽(大壁) 형식 및 주주(主柱) 형식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2.3. 수혈주거의 주주(主柱)와 화로(炉)의 배치 형식

일반적으로 수혈주거는 주주(主柱)와 화로(炉)의 배치에 있어서 나름대로의 규칙성이 발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 유형화 한 대표적인 이론 가운데 하나인 츠데히로시(都出比呂志)의 주주배치원리(主柱配置原理(1989))에 따르면, 주로 야요이시대의 수혈주거의 주주 배치형식은 Fig. 2.와 같이 바닥면의 중앙을 중심점으로 하는 원주상에 주주를 배치하고 중앙부에 화로를 위치시키는 구심 구조(求心構造)와 중심축의 양측에 주주를 배치하고 그 중심축 상의 벽측에 화로를 설치하는 대칭 구조(対称構造)로 분류되고 있다[7].

Fig. 2.

Layout pattern between main pillar and hearthsource; Kogawa Shinichi[7] 

그의 이론에 따르면 구심 구조는 서일본 지역을 중심으로 자주 나타나고 있으며 대칭 구조는 주로 동일본 지역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야요이시대 이후 도래한 집단과 재래 집단과의 지역 차를 논한 이중구조모델(二重構造モデル, 埴原和郎, 1995)10)의 해석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조몬시대의 수혈주거에서 화로가 대부분 중앙보다는 벽측에 설치된 것을 보면, 동일본 지역의 대칭 구조는 이미 조몬시대부터 계속 이어져 온 수혈주거의 잔존(残存)으로 볼 수 있으며 조몬인(縄文人)들이 대륙과는 별도의 교류 없이 독자적으로 진화한 종족이기 때문에 동일본 지역의 수혈 주거의 대칭구조는 조몬인의 독자적 창조물로 볼 수도 있다[7].


3. 카나가와현 시기별 수혈주거 분석

3.1. 카나가와 지역의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 분석 대상 및 방법

카나가와현(神奈川県)은 일본 관동(関東) 지방 남서부에 위치하며 온난한 기후 조건 및 동경 만(東京湾)과 사가미 만(相模湾) 등 두 개의 연안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하코네(箱根) 산 등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동식물의 번식에 적합한 구릉이나 평야 지대가 입지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원시 시대는 물론 각 시대를 통해 원주민의 생활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이다. 특히 이 지역에는 패총(貝塚), 집락지, 고분(古墳) 및 횡혈기(横穴墓)11) 등 원시시대부터 조몬시대 및 그 이후 시기의 유적이 약 7,500개소에 이르는 등 전국적으로도 유적이 많이 발굴된 지역이기도 하다.

본 연구에서는 카나가와 지역 발굴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 가운데 공인된 발굴 결과와 연도 및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발굴 사례를 시기별로 총 8개소를 선정, 각각에 대한 발굴 결과와 도면 및 실측 자료 등을 활용하여 평면 유형과 주주(主柱)의 구성 관계 및 내부 공간 구성 등을 분석하였다. 또한 조몬시대 이전인 구석기시대의 주거상 유구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사례에서 제외하였으며 오사카 지역 등 관동 지방과 가까운 지역에서 발굴된 구석기시대 주거상 유구 등을 대신 참고하였다. 고분시대 이후에는 수혈주거의 흔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주로 조몬시대부터 고분시대에 해당하는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를 중심으로 선정하였으며 특히 수혈주거가 조몬시대에 가장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조몬시대 조기부터 만기에 해당하는 4곳의 대표적인 수혈주거 유구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수혈주거의 규모나 구조 형식 등의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 가장 보편적이고 표준적인 4본주주 형식(4本主柱)의 수혈주거 사례를 중심으로 선정하였다. 수혈부의 깊이는 기후와 지형적인 영향으로 대부분 유구에서 1m 이하로 나타나고 있어 수혈주거의 시기적 변화를 살펴보는데 유의미한 부분이 없기 때문에 분석에서 제외하였다.

이에 따라 선정된 사례는 조몬시대 전기 수혈주거로 추측되는 바바와타우치야토 유적(馬場綿内谷遺跡)의 J 2 수혈주거, 조몬시대 중기의 카와시리나카무라(川尻中村遺跡)의 제 42호 수혈주거, 조몬시대 후기의 코야스·오오츠보 유적(子易・大坪遺跡)의 J 9 수혈주거 및 조몬시대 만기의 아오야마카이도 유적(青山開戸遺跡)의 J 4 수혈주거 등 4곳의 조몬시대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를 시기별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카나가와현의 경우, 야요이시대 전기의 수혈주거에 대한 조사 및 발굴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야요이시대 중기의 니시카타A 유적(西方A遺跡)의 Y 2 수혈주거, 야요이시대 후기의 우스쿠보A 유적(臼久保A遺跡)의 Y 10 수혈주거 등 야요이시대 수혈주거 유적 2곳을 대표적으로 선정하였으며 고분시대 전기로 추측되는 코우즈미츠마타(国府津三ツ俣遺跡)의 H 44 수혈주거와 고분시대 중·후기의 요시오카 유적군(吉岡遺跡群)의 제 1호 수혈주거 등 고분시대 수혈주거 유적 2곳 등 총 8곳의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를 사례로 선정하였다.

또한 각 시대별 수혈주거의 발전과정을 추적하기 위하여 각 시기별 수혈 주거 주거상 유구에 대한 분석은 주로 평면형의 변화, 주주(主柱) 형식의 변화와 이에 따른 구조적 변화 및 화로의 위치에 따른 변화 및 규모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반면에 주거지의 형상이나 지붕 구조 등 복원을 통해 추측 가능한 부분에 대해서는 논의에서 제외하였다. 각 주거상 유구에 대한 내용은 해당 유적에 대한 카나가와현립 매장문화재 센터 조사보고(神奈川県立埋蔵文化財センター調査報告) 내용과 카나가와 고고학재단 조사보고(かながわ考古學財團調査報告) 및 카나가와현 고고학 재단 고고자료관(考古資料館)에 수록된 내용을 주로 참고하였으며 각 유적 별로 보고서나 논문 등을 통해 내용을 추가적으로 검토 및 참고하였다. 선정된 사례와 그 개요 등은 Table 1.과 같다.

Key Examples of pit house from Jomon period to Kohun period in Kanagawa.

3.2. 수혈주거 평면형

카나가와 지역의 경우, 정주 생활이 시작된 조몬시대 전기부터 수혈주거의 주거상 유구가 본격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그 이전의 카나가와 지역의 수혈주거의 평면 형태는 해당 지역의 유구를 통해 알기 어려우나, 하사미야마 유적(はさみ山遺跡)이나 우에노하라 유적(上野原遺跡)에서 발견된 후기 구석기시대의 주거상 유구 및 마에다코우지 유적(前田耕地遺跡)에서 발굴된 조몬시대 초창기의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가 주주(主柱)가 없이 원형에 가까운 수혈의 바닥 마루 주변이나 외연부에 다루키시루(垂木尻)를 설치한 원형 평면의 평지주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12)[1,2,4] 조몬시대 조기(早期)의 수혈주거도 이전의 평지주거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2] 본격적인 정주 생활이 시작된 조몬시대 전기 이전까지의 카나가와현을 포함한 동북지역의 수혈주거의 평면 형태는 원형이나 원형에 가까운 형태가 일반적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Table 1.에서와 같이 카나가와 지역에서 발굴된 수혈주거 유구 가운데 조몬시대 전기로 추측되는 바바와타우치야토 유적(馬場綿内谷遺跡)의 J 2 수혈주거의 평면형은 불규칙한 방형을 보이고 있으며 조몬시대 중기의 유적인 카와시리 나카무라 유적(川尻中村遺跡)의 제 42호 수혈주거에서는 원형 평면 형태의 수혈주거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조몬시대 후기의 코야스·오오츠보 유적(子易・大坪遺跡)의 J 9 수혈주거의 경우 바닥에 돌을 깐 손거울 형(柄鏡型) 평면13)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주거 부분의 평면 형태는 기본적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조몬시대 전기 이후에는 수혈주거의 평면형이 주로 원형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카나가와의 경우, 손거울형 평면 형태가 급격하게 중가하는 조몬시대 중기 후반에 해당하는 가소리 E식 4기(加曽利 E式Ⅳ期)에도 그 이외의 수혈주거에서는 대부분 원형이나 타원형이 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11]도 이를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조몬시대 만기의 아오야마카이토 유적(青山開戸遺跡)의 J 4 수혈주거에서는 방형의 평면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카나가와의 야요이시대 전기의 수혈주거 유구는 조사 사례가 거의 없어 자세한 평면 형태는 알기 어려우나, 야요이 시대 중기로 추측되는 니시가타A 유적(西方A遺跡)의 Y 2 수혈주거 유구의 평면 형태가 방형보다는 원형이나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취하고 있는 사실을 보면 조몬시대 만기에 주로 방형으로 나타나던 평면 형태가 야요이시대 초기나 중기에는 다시 원형이나 타원형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추측 가눙하다. 그러나 야요이시대 후기로 추측되는 우스쿠보A 유적(臼久保A遺跡)의 Y 10 수혈 주거 평면은 모서리 부분이 둥근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네 변의 길이 등이 동일한 것을 보면 당시의 수혈주거의 평면 형태는 점차 방형에 다시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고분시대에 이르러서 더욱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고분시대 전기 유적으로 추정되는 코우즈미츠마타 유적(国府津三ツ俣遺跡)에서 발굴된 H 44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의 평면 형태는 비교적 사방이 균등한 방형을 보이고 있다. 특히 카나가와현에서의 고분시대 전기의 주거나 집락이 고분시대 중기까지 계속 유지되었다는 사실14)[8]을 보면, 방형의 평면 형태는 야요이시대 후기 이후부터 고분시대 전기 및 중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것으로 추측 가능하다. 이후 고분시대 중·후기의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가 발굴된 요시오카 유적군(吉岡遺跡群)의 제 1호 수혈주거의 경우,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방형 평면으로 정착되면서 4개의 주주와 함께 이른바 방형 4본 주주 형식의 수혈주거의 완성형이 나타나고 있다.

3.3. 수혈주거 주주(主柱) 형식

카나가와 지역에서 발굴된 수혈주거의 주주(主柱)도 역시 조몬시대 전기 이전의 수혈주거 유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앞서 살펴본 평면 유형과 마찬가지로 유사한 시기의 타 지역 수혈주거 유구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조몬시대 전기 이전의 시기는 앞서 살펴본 하사미야마 유적(はさみ山遺跡)의 경우처럼 대부분 수혈 주거 내부에 주주(主柱)가 없이 측벽 부분이나 외연부에 얇은 기둥을 설치하여 지붕을 지지하는 형식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카나가와 지역의 조몬시대 전기 이전의 수혈주거가 존재했을 경우 다른 지역과 유사하게 주주가 없는 간단한 형식의 구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조몬시대 전기로 추측되는 카나가와 지역의 바바와타우치야토 유적(馬場綿内谷遺跡)의 J 2 수혈주거에서는 수혈 주거 내부에 다수의 주주(主柱)가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그 가운데 벽 측 내부 네 귀퉁이 쪽의 주혈이 특별하게 깊게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주로 4개의 기둥이 지붕을 지지한 것으로 추측된다. 나머지 기둥의 경우, 주주의 보조 기둥 역할이거나 혹은 화로 설치 흔적이 2개소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초의 건물을 증축 혹은 개축할 때 추가된 기둥으로 추측된다. 또한 주거의 벽측에는 도랑(溝)이 파져 있으며 이곳에 벽을 보호하기 위한 벽재가 채워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몬시대 중기의 유적인 카와시리 나카무라 유적(川尻中村遺跡)의 제 42호 수혈주거의 경우 수혈주거의 벽측에 설치된 5개의 기둥이 나타나고 있다. 평면 형상이 손거울 형상을 보이고 있고 주거 내부에 돌이 깔려 있는 조몬시대 후기의 코야스 오오츠보 유적(子易・大坪遺跡)의 J 9 수혈주거의 경우, 내부의 기둥 대신 벽측이나 혹은 벽과 일체화 된 기둥이 사용된 이른바 벽주 혹은 대벽구조로 추측되기 때문에 여전히 4본 주주 형식의 정형화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몬시대 만기의 아오야마카이토 유적(青山開戸遺跡)의 J 4 수혈주거에서는 내부의 주주 4개와 벽측에 수많은 벽주(壁柱)의 흔적이 발견되는 등 불규칙한 4본 주주 형식과 벽주 형식이 결합된 형식을 보이고 있다.

야요이시대에도 여전히 수혈주거의 4본 주주 형식이 이어지고 있다. 야요이시대 중기로 추측되는 니시가타A 유적(西方A遺跡)의 Y 2 수혈주거 유구의 경우 발굴 평면 내부에서 모두 8개의 주혈(柱穴)이 발견되고 있으나 저장혈(貯藏穴)로 보이는 하단부의 비교적 큰 주혈과 계단이나 사다리 등을 설치할 목적의 입구혈(入口穴)로 추측되는 입구 부분의 주혈을 제외하면 6개의 주혈로 구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4개소의 주혈이 다른 2곳에 비해 더 깊고 큰 주혈로 나타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4본 주주 형식과 유사한 기둥 배치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야요이시대 후기에도 조몬시대와 마찬가지로 수혈주거의 지붕을 주로 4개의 기둥이 지지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으며 나머지 2개의 기둥은 보조 기둥으로 사용되거나 혹은 증개축 시 시용된 기둥의 흔적으로 추측된다. 이 같은 사실은 야요이시대 후기로 추측되는 우스쿠보A 유적(臼久保A遺跡)의 Y 10 수혈 주거에서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해당 유구의 경우, 총 5개의 주혈이 발견되고 있으나 통상 수혈주거에서는 화로의 반대편에 출입구가 설치되기 때문에 화로 반대편의 주혈은 출입구용 기둥으로 추측되며 이를 제외하고 보면 외벽의 주구(周溝)보다 내측에 4개의 기둥이 서로 대칭으로 위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4본주주 형식은 Fig. 3.에서와 같이 고분시대에도 계속되고 있다. 고분시대 전기 유적으로 추정되는 코우즈미츠마타 유적(国府津三ツ俣遺跡)에서 발굴된 H 44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의 경우 주주의 위치 관계 등이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고분시대 중·후기의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가 발굴된 요시오카 유적군(吉岡遺跡群)의 제 1호 수혈주거의 경우 전후좌우 4개의 주주(主柱)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면 야요이시대 후기에 시작된 방형 4본주주 형식의 수혈주거가 이 시기에 완전하게 정착된 것을 알 수 있다.

Fig. 3.

Shape of floor plan with the placement of pillars and hearth from Jomon period to Kohun period in Kanagawa

3.4. 수혈주거의 규모

카나가와 고고학재단 조사보고(かながわ考古學財團調査報告, No.295, No. 133, No. 292, No.29, No.157, No.60, No. 81, No. 47)[15]에 따르면, 조몬시대 전기 수혈주거로 추측되는 바바와타우치야토 유적(馬場綿内谷遺跡)의 J 2수혈주거 규모는 주축과 횡축이 각각 5.8m×5.2m, 면적 약 30.16m2이며 조몬시대 중기의 카와시리나카무라(川尻中村遺跡)의 제 42호 수혈주거는 주축과 횡축이 각각 약 7.74m, 7.66m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거의 원형에 가까운 평면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 면적은 약 46.54m2 정도로 추정 가능하다.

조몬시대 후기의 코야스·오오츠보 유적(子易・大坪遺跡)의 J 9 수혈주거는 출입구 부분을 제외한 원형 주거 공간의 주축과 횡축이 각각 4.15m와 3.15m 정도이나 원형임을 감안하면 그 면적은 약 10m2 정도의 소규모 주거로 보여진다. 조몬시대 만기의 아오야마카이토 유적(青山開戸遺跡)의 J 4 수혈주거는 북측 부분이 결손되어 정확한 수치는 알기 어려우나 나머지 한 변의 길이가 5.2m-5.4m 정도의 방형 평면이기 때문에 그 면적은 약 25m2 전후로 추측 가능하다. 야요이시대 중기의 니시카타A 유적(西方A遺跡)의 Y 2 수혈주거는 주축과 횡축이 5.57m×4.53m 규모의 면적 25.2m2이며 야요이시대 후기의 우스쿠보A 유적(臼久保A遺跡)의 Y 10 수혈주거는 각각 7.64m×6.68m로 면적은 약 51.0m2를 보이고 있다. 고분시대 중기로 추측되는 코우즈미츠마타 유적(国府津三ツ俣遺跡)의 H 44 수혈주거의 경우, 주축과 횡축이 7.1m×6.0m(42.6m2)이며 고분시대 중·후기의 요시오카 유적군(吉岡遺跡群)의 제 1호 수혈주거는 4.4m×4.2m(18.48m2)의 규모로 나타나고 있다.

이상의 사실을 보면, Table 1.에서와 같이 카나가와 지역에서 발굴된 수혈주거는 규모상 20m2-25m2 정도의 소규모부터 25m2-50m2 정도의 중규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시기별로는 조몬시대 전기나 중기의 수혈주거가 비교적 중형의 규모를 보이다가 후기나 말기에는 소형화되고 있으며, 그 이후 이와 같은 흐름이 야요이시대 중기까지 이어지다가 야요이시대 후기 및 고분 시대 전기에는 다시 비교적 규모가 큰 중규모 주거로 나타나고 있다. 이후 고분 시대의 말기에는 다시 소형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3.5. 수혈주거의 화로의 위치

카나가와에서 발견된 야요이시대의 수혈주거 내부의 화로의 위치는 조몬시대 전기로 추측되는 바바와타우치야토 유적(馬場綿内谷遺跡) J 2 수혈주거의 경우, 주거의 거의 중앙부와 중앙보다는 벽측으로 가까운 곳에 화로(炉)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당시 수혈주거 내부에 화로가 일반적으로 1곳에 설치되는 것을 보면 두 개 가운데 하나는 후일 개축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두 곳의 위치가 주주를 대각선으로 연결한 선상에 위치하는 것을 보아 화로는 주거의 거의 중앙부에 설치된 것을 알 수 있다. 조몬시대 중기의 카와시리나카무라 유적(川尻中村遺跡)의 제 42호 수혈주거에서는 화로가 중앙 부분보다 약간 안 쪽 벽쪽에 치우쳐 설치되고 있다. 그러나 조몬시대 후기의 코야스·오오츠보 유적(子易・大坪遺跡) J 9 수혈주거에서는 다시 거의 중앙부나 약간 출입구 쪽에 치우쳐 화로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후 조몬시대 만기의 아오야마 카이토 유적(青山開戸遺跡)의 J 4 수혈주거에서도 후기와 마찬가지로 내부의 중앙보다 약간 출입구 쪽으로 치우쳐 설치되고 있다.

이는 초기에는 화로가 수혈주거 중앙부에 설치되었으나 중기에는 중앙보다는 약간 안쪽 벽측에 설치되다가 후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중앙이나 오히려 출입구 쪽으로 치우쳐 설치 되는 등 시기에 따라 화로의 위치가 약간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로의 위치가 거의 벽측보다는 중앙부에 근접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야요이시대에는 수혈주거 내의 화로의 위치가 대부분 내부공간의 중심부보다는 벽측에 가깝게 배치되고 있다. 야요이시대 전기의 니시카타A 유적(西方A遺跡)Y 2 수혈주거의 경우, 화로는 수혈주거 중앙 부분이 아니라 후면 기둥 안쪽에 벽측에 약간 치우쳐 위치하고 있으나 야요이시대 후기의 우스쿠보 A 유적(臼久保A遺跡)의 Y 10 수혈주거에서는 화로가 후면 기둥과 일렬로 배치함으로써 더욱 벽측에 근접하여 설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분시대 후기가 되면서 앞서 언급한대로 수혈주거 내에 화로 대신 화덕(竈, かまど)이 설치되기 시작함에 따라 화로의 위치에도 변화가 발생한다. 고분시대 전기의 코우즈미츠마타 유적(国府津三ツ俣遺跡)의 H 44 수혈주거에서는 카마도로 추정되는 부분이 서측 벽 부분에 설치되어 있고 그 주변에 화로 사용 흔적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카마도와 화로의 병용이 추측되나 중·후기의 요시오카 유적군(吉岡遺跡群)의 제 1호 수혈주거의 경우에서는 출입구 반대측 벽 쪽에 화덕이 설치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카나가와 지역의 각 시기별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의 평면형태와 주주 배치 및 화로의 위치 등을 정리하면 Fig. 3.과 같다.


4. 카나가와현 발굴 유구를 통해 본 일본 원시시대 수혈주거의 변화

4.1. 수혈주거 평면 형태와 주주 형식의 변화

앞의 카나가와 지역의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 분석에서는 평면형태와 주주 유무 및 배치, 화로의 위치 및 평면의 규모 등을 개별적으로 살펴보았으나, 평면 형태의 변화나 규모의 변화 등은 주로 주주(主柱)의 유무 및 개수와 연동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평면 형태의 변화와 주주 형식의 변화를 종합하여 수혈주거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Fig. 3.에서처럼 카나가와현 발굴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의 평면 형태는 조몬시대 조기 불규칙 장방형에서 중기와 후기 원형, 만기에는 방형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나가노현 마시노신기리 유적(增野新切遺跡)의 조몬시대 중기 후반의 수혈주거지의 경우 원형과 모서리가 둥근 방형 및 방형의 평면 유형이 함께 발굴되는 것을 보면 이 같은 변화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최소한 중기 후반까지는 원형과 방형 등이 공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6].

주주 형식의 경우, 카나가와 지역의 조몬시대 전기 바바와타우치야토 유적(馬場綿内谷遺跡)의 J 2 수혈주거는 벽 측의 4개의 기둥 이외에도 내부에 몇 개의 기둥 흔적이 발견되고 있으며 벽을 따라 일정한 홈이 파져 있는 형태로 볼 때 4개의 주주 혹은 그 이상의 주주 형식과 벽식 구조가 혼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일반적으로 조몬시대 조기(早期)의 수혈주거가 부정형 평면으로부터 방형 및 장방형 평면으로 정비되면서 구조적으로도 보다 큰 공간을 만들기 위해 1-2개의 지주(支柱)와 합장(合掌) 혹은 삼각 구조로 용마루대(棟木)를 지지하는 기법이 나타나고 있는 사실[2]이나 당시 카나가와 지역에서 발견된 수혈주거의 주주혈이 4개부터 7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존재했다는 사실15)을 고려할 경우, 명확한 4본주주 형식이 정착되기 전 단계이거나 혹은 주거의 규모나 형상에 따라 주주의 사용 정도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카고시마현 카쿠리야마 유적(加栗山遺跡)에서 발굴된 17개 동의 유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몬시대 전기 전반부에 벽립식 수혈주거가 나타났으며[2] 관동지역에서는 주주 4-6개의 사다리꼴(台形) 평면의 벽립식 수혈주거가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조몬시대 전기 이후 관동지역의 일반 집락에서는 벽립식 수혈주거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며 벽주 없이 지붕을 지표면까지 내려서 설치하는 후세야식(伏屋式)16)이 증가하게 된다17)는 미야모토 나가지로 등의 연구[2]를 참고할 경우, 해당 유구는 벽립식과 후세야식의 중간 과정에 속하는 것으로도 추측 가능하다. 반면에 조몬시대 중기의 카와시리나카무라(川尻中村遺跡) 42호 수혈주거에서는 명확하게 4본 주주 형식이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조몬시대 전기부터 중기까지는 주로 주주 형식이 주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18)

조몬시대 후기의 코야스·오오츠보 유적(子易・大坪遺跡)의 손거울 형 수혈주거 J 9에서는 주주가 없이 벽주만으로 구성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혈벽을 따라 원통형의 대벽(大壁)을 설치하는 형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9) 수혈주거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조몬시대 초기의 일반적인 구조 형식이 대벽식 수혈 주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2], 전기 이후 주주 지지 형식으로 변화하다가 후기에 이르러 다시금 벽립식으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유사한 시기의 다른 지역 유적인 카고시마현 카쿠리야마 유적(加栗山遺跡)이나 오사카부의 이마시로(今城) 유적 등에서 주주와 벽주를 이용하여 측벽이 수혈면 보다 높게 만들어 지붕이 땅에 닿지 않는 형태의 벽립식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가 발견되고 있는 사실은 이 같은 벽주 방식이 조몬시대 전기부터 동일본이나 서일본을 막론하고 주류를 이루었던 구조 형식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20)[2]. 조몬시대 만기의 아오야마카이토 유적(青山開戸遺跡)에서는 주주 4개와 벽주가 공존하는 이른바 벽주 주주 병용형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조몬시대 만기의 수혈주거의 면적이 상대적으로 중대규모화 되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조적 장치로 추측할 수 있다.

야요이시대에는 조몬시대 만기의 일반적인 수혈주거 평면형이었던 방형 평면 형태가 다시 원형으로 변화하는 등 평면 형태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으며 주주의 형식은 조몬시대 후기와 말기에 나타난 벽주나 4개 주주에 벽주를 더한 대벽구조에서 벽주가 사라지고 4본주주 형식이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4본주주 형식은 야요이시대 이후부터 고분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평면 형태에서는 앞 사례의 우스쿠보A 유적(臼久保A遺跡)의 Y 10 수혈주거에서 볼 수 있듯이, 야요이시대 후기부터 모서리 부분이 약간 둥근 방형(隅丸方形)이 나타나면서 원형과 방형 사이의 과도기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교토의 키즈시로야마 유적(木津城山遺跡) 등에서 발굴된 야요이 시기 및 고분 시기의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 가운데 원형 평면 의 수혈주거(8기)보다 모서리가 둥근 방형 평면의 수혈주거(20기)가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21)이나 서일본의 경우 기원전 2세기 경인 야요이시대 중기 전반에는 기존의 원형 평면으로부터 타원형에 가까운 평면 형태가 나타나는 등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사실22)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의 수혈주거 평면형이 어느정도 원형에서 방형으로의 전이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23)

이후 고분시대에는 코우즈미츠마타(国府津三ツ俣遺跡)의 H 44 수혈주거의 경우처럼, 수혈주거의 평면은 방형으로 정착하게 되며 기존의 4본주주형식이 결합되면서 방형 4본주주형식의 수혈주거가 나타나게 된다.24) 이 같은 방형 4본주주 형식은 이미 서일본의 경우 야요이시대 후기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고분시대 전기에 이르러서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고 고분시대 후기 이후는 화덕을 설치한 4본주주 형식이 일반화 되었다는 시게후지 테루유키(重藤輝行) 등의 연구25)를 참고할 경우, 동일본만이 아니라 일본 전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던 표준적인 수혈주거 구조형식임을 알 수 있다[5].

이상의 사실을 보면 카나가와 지역에서의 수혈주거의 평면 형태는 조몬시대에는 불규칙 장방형에서 원형 및 장방형 평면으로 변화하며 야요이 시대에는 다시 원형이나 모서리가 둥근 방형을 거쳐 이후 고분시대까지는 장방형의 평면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한 구조형식은 조몬 시대 전기에는 조몬시대 조기 종말기 무렵부터 사용된 4-6본의 주주 형식과 기존의 벽주(壁柱)26)방식이 혼용되다가 중기에 4본 주주형식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후기에 다시 벽주형 대벽구조로 변화하고 만기의 벽주 주주 병용형을 거쳐 야요이 시대에 이르러 주로 4본 주주로 통일되면서 야요이 시대 중기 이후부터 주거의 기본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이에 따라 수혈주거의 형상도 벽립식과 후세야식이 번갈아 나타나다가 야요이 시대에 이르러 벽주가 소멸됨에 따라 후세야식으로 정착되는 것을 알 수 있다27)[2].

그러나 나가노현 마시노신기리 유적( 增野新切遺跡)의 조몬시대 중기 후반의 수혈주거지의 경우 원형과 모서리가 둥근 방형 및 방형의 평면 유형이 함께 발굴되고 있고 중북부 지역의 습지 유적인 온다시 유적(押出遺跡)에서는 연약지반 하단부에 기둥을 설치하여 측벽을 만든 벽립식 주거만 발굴되고 있으며 관동 지역인 토치기현의 네고야다이 유적(根古谷台遺跡)에서는 후세야식 수혈주거와 기둥 6개의 100m2가 넘는 초대형 벽립식 수혈주거가 병존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28)[2], 수혈주거의 평면 형태 및 구조 형식은 특정 형태나 형식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다른 형식이 대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입지나 기후 등 지역적 상황 및 규모 등에 따라 혼용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29)

4.2. 수혈주거의 규모 변화

통상 수혈주거의 주거상 유구는 오랜 기간 동안 동일 위치에서 개축되거나 증축되는 등 중복적으로 발굴되기 때문에 시기가 오래된 주거상 유구일수록 그 정확한 규모 등을 파악하기는 용이하지 않다. 또한 동일 유적지라도 다양한 규모의 수혈주거가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본 연구에서 선정한 사례만으로 특정 시기의 수혈주거의 규모를 단정적으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유사한 시기에 카나가와 지역 이외에서 발굴된 수혈주거의 규모 등을 본 사례와 비교함으로써 보다 객관적인 규모 등을 추론할 필요가 있다.

우선 카나가와 지역의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앞서 살펴본 대로 바바와타우치야토 유적(馬場綿内谷遺跡)의 J 2 수혈주거의 규모는 주축과 횡축이 각각 5.8m×5.2m, 면적 약 30.16m2, 조몬시대 중기의 카와시리나카무라(川尻中村遺跡)의 제 42호 수혈주거는 주축과 횡축이 각각 약 7.74m, 7.66m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거의 원형 평면임을 고려할 경우 그 면적은 약 46.54m2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카와시리나카무라 유적(川尻中村遺跡)에서 발굴된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의 규모가 한 변이 4m에서 최대 7.8m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밝힌 아마노 켄이치(天野 賢一)의 발굴 조사 결과30)[14] 를 참고할 경우, 본 연구의 사례는 중규모의 수혈주거임을 유추할 수 있으며 이 밖에도 당시에는 소형과 중형 수혈주거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몬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코야스·오오츠보 유적(子易・大坪遺跡)의 J 9 수혈주거의 규모는 출입구 부분을 제외한 거주 공간이 종축과 횡축이 약 4.15m×3.15m이면서 그 면적은 약 10.0m2 정도의 소형 수혈주거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거의 동일한 시기인 조몬시대 후기 초엽에 해당하는 쇼묘지식 토기문화기(称名寺式土器文化期)의 원형 및 타원형 수혈 주거의 규모가 주거의 장축 길이가 4.7m-6.1m 등31)으로 나타나고 있고 조몬시대 후기 기타 지역에서 발굴된 손거울형 평면의 수혈주거 유적의 경우 길이 1.8m-2.6m, 폭 1.7m- 2.3m의 돌출 부분을 제외하면 주거 부분 장축의 수치는 약 5m-6m 정도이기 때문에 이전과 거의 유사한 규모이거나 혹은 약간 작은 규모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11].

조몬시대 말기에 해당하는 카나가와 지역 아오야마카이토 유적의 J 4 수혈주거의 규모는 손상된 북측의 치수가 불분명하고 나머지한 변의 길이가 5.2m로 나타나기 때문에 정확한 면적은 알기 어려우나 당시 대부분의 수혈주거가 정방형에 가까운 장방형임을 가정하면 그 면적은 약 25m2 전후의 표준적인 규모임을 추론 가능하다.

이상의 사실로부터 카나가와 지역의 조몬시대 수혈주거의 규모는 10m2 전후의 소규모부터 25m2 전후의 표준 규모 및 25m2 이상의 중규모 등이 혼재하면서 나타나고 있으며 시기별로 보면 전기와 중기까지는 비교적 중규모의 수혈주거가 존속하고 있었으나 후기에 그 면적이 소규모로 축소되다가 말기에 이르러 다시금 25m2 전후의 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조몬시대 후기 수혈주거인 코야스·오오츠보 유적(子易・大坪遺跡)의 J 9가 다른 유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로 나타나는 것은 해당 사례가 비주거 건축물이거나 혹은 관동지방의 기후 냉화(冷涼化)가 시작되면서 마을의 이동이나 동요가 활발했던 시기인 조몬시기 중기 말 무렵의 전반적인 시대적 및 기후적 상황32)이 반영된 것으로 추측된다. 혹은 해당 건축물이 일반적인 주거라기보다는 종교적 제례 등을 위한 비 주거 건축물일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카나가와 지역의 조몬시대 후기 전엽말에 해당하는 호리노우치식(堀之内式) 토기문화기의 수혈주거의 규모가 전체 길이 2.6m에서 9.2m에 이르는 것33)[12]을 보면 소규모 수혈주거와 중 대규모 수혈주거가 공존하던가 혹은 수혈주거의 면적이 중대형화 되고 있음도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관동 지역의 조몬시대 수혈주거 면적을 정리한 미야모토 나가지로의 연구에 따르면, 조몬시대 말기의 평균 면적이 생활 문화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조몬시대 조기에 비해 최대 평균이나 최소 평균값이 4배 이상 증가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조몬시대 조기부터 중기까지 주류를 차지하던 면적 10m2-20m2 정도의 수혈주거가 후기나 말기에서는 그 수효가 줄어들고 10m2 이하의 소형 수혈 주거는 거의 그 모습을 감추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Table 1.Fig. 4.에서와 같이 조몬시대 전기에는 상대적으로 그 수효가 적었던 20m2-30m2 규모의 수혈주거는 조기 이후 후기까지 자주 나타나고 있으며 30m2-40m2 규모의 수혈주거는 초창기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다가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나타나고 있다. 40m2-50m2나 50m2-60m2 규모의 대형 수혈주거는 중기까지는 거의 보이지 않다가 말기 이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 이는 전체적으로 수혈 주거의 면적이 전기나 중기에 비해 말기로 갈수록 급격하게 커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인구밀도의 상승기였던 조몬시대 중기 적정 가족 인수 약 5인으로 상정할 경우, 약 17m2-18m2 정도가 일반적인 규모이나 후기나 말기에는 비정상적으로 면적이 커지고 있다.

Fig. 4.

Distribution by size in each period in Jomon Period

이는 조몬 시기 전기부터 동북지역이나 북륙(北陸) 지방에 공동 작업장이나 제례용 초대형 수혈주거34)가 나타나기도 하는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 주거라기보다는 공동 작업장 등일 가능성이 높으며 혹은 조몬 시기 후기 환상(環狀)집락 유적인 코마루(小丸)유적에서 발견된 핵가옥(核家屋)35)처럼 집락 내의 특수한 계층이나 지위에 있는 존재가 거주한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가족이 거주하는 단위 주거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조몬시대에는 인구밀도가 가장 높았던 중기를 기준으로 보면 일반적으로는 4-7개의 기둥이 사용된 직경이나 장변이 5m-6m 정도, 면적이 10m2-30m2 정도의 수혈주거가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야요이시대 중기에는 앞서 살펴본 니시카타A 유적(西方A遺跡)의 Y 2 수혈주거가 5.57m×4.53m로 약 20.2m2의 면적을 보이고 있는 것처럼, 조몬시대 말기의 대형화 추세가 멈추고 있거나 소형화되고 있다36)[13]. 이는 카나자와 인근 지역인 요코스카시 카모이우에노다이 유적(鴨居上の台遺跡)에서 발굴된 야요이시대부터 고분시대에 걸친 유구에 해당하는 126개의 수혈주거 유구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82호 수혈주거가 약 56.71m2이며 가장 작은 규모인 103호 주거는 5.30m2로 대략적인 평균치는 약 24m2 전후로 나타나고 있는 사실과 거의 일치하고 있으며 관동 지방에서 발굴된 수혈주거의 규모를 기둥 1본 당 약 5.2m2 정도의 면적을 보이고 있다는 미야모토 나가지로의 연구[2]와 4본 주주의 수혈주거의 평균 규모가 반경 약 2m, 5본 주주의 경우 반경 약 2.6m, 6본 주주의 경우 반경 약 3.2m 등 주주가 1개씩 증가할 때마다 그 반경은 약 0.6m씩 증가한다는 시부야 후미오(渋谷 文雄)의 연구37)[10] 결과와도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효고현 히가시하리마(東播磨) 지역에서 발굴된 수혈주거의 경우 20m2 미만의 소형 주거가 중기 전반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전체 발굴 수혈주거의 40% 정도를 점하고 있을 정도로 꾸준하게 나타나고 있었다는 사실[9]을 보면 20m2 전후 규모의 수혈주거는 야요이시대 전반에 걸쳐 가장 일반적인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 가능하다. 그러나 야요이시대 후기의 우스쿠보A 유적(臼久保A遺跡)의 Y 10 수혈주거의 경우, 이전 중기의 수혈주거 규모의 2배에 달하는 약 51.0m2의 면적을 보이고 있다. 이는 야요이시대 후기에 거주만이 아니라 농경을 위한 공동 작업장 등 특정 작업이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일종의 구획 시설일 가능성이 높으나 앞의 히가시하리마(東播磨)에서도 6인 정도가 거주한 것으로 추측되는 직경 7m 정도, 면적 40m2-50m2 정도의 수혈건물에 다수 발견되는 것을 보면[9], 야요이시대 후기의 농업 생산의 증대와 인구 증가 등이 주거의 규모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측 가능하다.

고분시대 중기의 코우즈미츠마타(国府津三ツ俣遺跡)의 H 44 수혈주거의 규모도 약 7.1m×6.0m에 42.6m2 정도의 면적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흐름은 최소한 고분시대 전기 및 중기까지 계속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농지로부터의 수확의 확대나 화로를 대신한 카마도의 설치 등 사회적 변화에 따른 수혈주거 내부 공간 확대 등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고분시대 중·후기의 요시오카 유적군(吉岡遺跡群)의 제 1호 수혈주거는 그 규모가 18.48m2 정도의 소규모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거의 같은 시기의 유적인 치바현의 오타니구치 유적(大谷口遺跡)의 21개의 수혈주거의 평균 면적이 약 40.30m2 정도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38)[13] 상대적으로 소규모이기 때문에 예전부터 주류를 이루던 소형 주거가 고분시대 후기까지 이어져 오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평지주거 유입에 따른 수혈주거 쇠퇴기의 과도기적 형태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부분의 수혈주거가 한 변 혹은 직경이 5m-6m 정도의 표준 치수를 보이고 있으며 당시의 수혈주거가 4본주주 형식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주거는 앞서 언급한대로 기둥 한 개당 약 5.2m2를 적용하면 약 20m2-25m2 정도일 것으로 추측 가능하다. 이는 조몬시대 관동지역 수혈주거의 주주의 유무에 따른 각 유형의 평균 면적을 주주가 없는 경우는 14.03m2, 2본 주주의 경우 20.70m2, 4본 주주의 경우 20.65m2 및 6본 주주의 경우 31.48m2 등으로 정리한 미야모토 나가지로의 연구 결과[2]와도 거의 유사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경향은 7세기경 지면을 파 내려가지 않고 지표면을 주거의 바닥으로 사용하는 이른바 홋다테바시라(掘立柱) 평지주거가 보급된 이후 에니나시의 혼고 유적(本鄕遺跡)의 경우처럼 평균 면적 16m2로 소형화되고 헤이안 시대에는 평균 10m2 정도로 더욱 축소되는 등 수혈주거의 소멸기에 가까워질수록 수혈주거의 바닥 면적이 극단적으로 축소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의 사실에서 카나가와 지역을 포함한 관동 지역에서의 수혈주거의 규모는 조몬시대 초기부터 중기까지는 10m2-20m2 정도의 소규모 수혈주거가 주를 이루다가 후기와 말기에는 20m2-30m2 이상의 중규모로 발전하며 야요이시대 초중기에는 다시 그 규모가 소형화되고 야요이시대 후기와 고분시대에는 중대형화 되다가 그 이후 평지주거나 고상주거로 대체되면서 면적이 축소되고 점차 소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수혈주거의 규모가 비교적 작았던 조몬시대 초기부터 후기까지 및 야요이시대에는 수혈주거의 평면 형태가 원형이나 타원형이 주로 나타나고 면적이 대형화되던 조몬시대 말기나 고분시대에는 수혈주거의 평면 형태가 주로 방형이나 장방형을 띠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는 조몬시대 전기 관동지방의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 가운데 일반 주거의 평면 형태가 장방형이나 사다리꼴이었음에 반해 소형 주거는 벽주(壁柱) 없는 원형이나 부정형 평면이 나타나고 있었다는 미야모토 나가지로의 연구 결과39)[2]를 참고할 경우, 초기에는 비교적 수혈주거의 규모가 소규모 원형 평면으로부터 점차 중규모 방형 평면으로 전이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4본주주나 6본 주주의 경우, 평면 형태는 원형이나 타원형은 나타나지 않고 대부분 장방형이나 방형 및 사다리꼴로 나타나고 있으며 주거 면적도 최소 17.7m2부터 30.7m2에 이르는 등 비교적 중규모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2] 등을 종합할 경우, 수혈주거가 소규모일 경우에는 원형 평면이 주로 적용되고 비교적 중규모 이상의 수혈주거에는 방형이나 장방형 평면이 적용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4.3. 수혈주거의 주주와 화로와의 관계

앞서 살펴 본 카나가와 지역의 수혈주거에서는 고분시대 중기 이후 카마도가 화로를 대체하기 이전까지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수혈 주거 내부에서는 그 위치가 중앙 부분이거나 한 쪽 벽 측에 치우치는 등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우선 조몬시대 조기나 중기에는 내부의 거의 중앙 부분(馬場綿内谷遺跡, J 2)이나 각 기둥을 대각선으로 연결하는 선상에 위치(川尻中村遺跡, 42호 유적)하고 있으나 조몬시대 후기나 만기에는 반대로 오히려 출입구 쪽에 근접하여 설치되고 있다(子易・大坪遺跡 J 9, 青山開戸遺跡, J 4). 그러나 야요이시대에 들어서면 다시 기둥의 대각선 교차점 부근(西方A遺跡, Y 2)이나 혹은 출입구와 반대편 벽쪽으로 치우쳐 위치(臼久保A遺跡, Y 10)하게 된다. 고분시대에도 이 같은 흐름이 이어지다가 중기 이후 화로를 대체한 카마도는 요시오카 유적군(吉岡遺跡群)의 제 1호 수혈주거에서처럼 완전히 출입구 반대편 벽쪽에 부착된 상태로 설치되고 있다.40)

이 같은 사실로부터 조몬시대에는 수혈주거 내부의 화로의 위치가 정형화 되어있기보다는 출입구와 반대편 벽 연장선 상에 임의적으로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야요이시대 이후에야 기둥의 대각선 교차점 부근에서 약간 벽측으로 위치하거나 혹은 출입구와 반대편 벽쪽에 근접하는 식으로 정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분시대 카마도의 경우 완전히 출입구 반대편에 설치되는 것도 이 같은 흐름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앞의 2.3에서 살펴본 츠데히로시(都出比呂志)의 주주배치원리(主柱配置原理)(1989)에 따르면, 조몬시대에는 화로의 위치가 출입구나 벽측에 임의적으로 설치되고 있으나 주주의 대각선 중심 상에 위치하지 않기 때문에 구심구조라기보다는 대칭구조에 가까운 배치를 보이고 있으며 야요이시대에는 주주의 중심축 선 상의 벽측에 화로를 설치하는 전형적인 대칭 구조를 보이고 있다. 구심구조가 서일본 지역에서 자주 나타나는 배치형식인 반면 대칭구조는 동일본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형식으로 볼 경우, 동일본 지역에 해당하는 카나가와 지역의 수혈주거에서의 주주와 화로의 배치는 거의 대칭구조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역으로 동일본 지역의 수혈주거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화로의 위치가 출입구 반대편 벽측에 설치되는 대칭구조를 채택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5. 결론

이상에서 카나가와 지역에서 발굴된 조몬시대부터 고분시대에 걸친 수혈주거 유구를 중심으로 평면 형태, 주주 형식, 규모 및 구조 형식 등의 변화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에 대한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평면 형태와 주주 형식은 원형이나 타원형 및 장방형의 평면형태가 중첩 및 반복되면서 마지막 단계에서는 장방형 평면으로 변하고 있으며 내부의 주주(主柱)도 조몬시대 전기와 중기에는 4개, 5개, 6개 주주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다가 후기와 말기에 주주 없이 벽주만 채용하는 형식이나 주주 벽주 병용 형식을 거쳐 야요이시대 이후에는 대부분의 경우 방형 4본주주 형식으로 통일되고 있다.

카나가와 지역의 수혈주거의 규모는 10m2 전후의 소규모부터 25m2 전후의 표준 규모 및 25m2 이상의 중규모 등이 혼재하면서 나타나고 있다. 시기별로 보면 조몬시대 전기와 중기까지는 비교적 중규모의 수혈주거가 존속하고 있었으나 후기에 그 면적이 소규모로 축소되다가 말기에 이르러 다시금 25m2 전후의 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야요이시대 중기 이후부터 수혈주거의 중 대규모화가 나타난 이후 고분시대 말기에 이르러 평지주거 등이 유입됨에 따라 수혈주거의 쇠태기를 맞이하면서 그 규모가 축소되고 있다.

카마도가 도입되기 전의 화로의 위치는 수혈주거 중심선을 따라 조몬시대 전기 벽측 설치에서 후기와 만기 출입구쪽으로 변하다가 야요이시대부터 다시 벽측 설치로 변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동일본의 일반적인 주주와 화로 배치 유형인 대칭구조와 일치하고 있다.

이상의 연구는 카나가와 지역의 수혈주거 유적에 대한 원시시대 각 시기별 수혈주거의 평면적 및 구조적 특징과 그 변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수혈주거가 가장 늦게까지 존속하였던 해당 지역은 물론 관동 지역의 수혈주거의 변화 과정을 파악하기 위한 기초적인 자료로서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다양한 시대가 중복되어 발굴되는 복합 유적지의 유구에 대한 고고학적 시기 판단이나 개별 발굴 유적에 대한 상세한 조사 내용 등은 기존의 발굴 보고서와 관련 연구 등을 통해 알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에 따른 자료의 객관적 검증이 어려우며, 본 연구의 범위도 평면 형태나 주주 형식 등 시각적으로 판단 가능한 내용에 국한되고 있어 수혈주거의 복원을 통한 전체 형상이나 정확한 구조 형식 등을 모두 논하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는 향후 본 연구에서 진행한 내용을 발전시켜 수혈주거의 기후대응 및 지역 재료 사용 등 생태환경적 측면에서의 특징이나 수혈주거에 내재하는 오늘날 일본 주거의 원류성 등을 심도있게 살펴보기로 한다.

Notes

1) 조몬시대의 세부적인 시대 분류는 다음에 따른다. 초창기(B.C. 10,000-B.C.7,500)-조기(B.C.7,500-B.C.5,000)-전기(B.C.5,000-B.C.3,500)-중기(B.C.3,500-B.C.2,500)-후기(B.C.2,500-B.C.1,000)-말기(B.C.1,000-B.C. 300)
2) 발굴조사에 따르면, 당시 식용이기도하고 기둥으로도 사용되는 밤나무를 재배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을 보면, 밤나무가 재질이 부드럽기 때문에 채벌 후 가공하기 용이한 편이며 건조하면 탄력성이 있다는 사실을 당시에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3) 石野博信,『古代住居のはなし歴史文化セレクション』, 吉川弘文館, 2006年에서 재인용
4) 公益財団法人 かながわ考古学財団 HP, 旧石器時代の遺構, 火の使用에서 인용
5) 吉川竜実, 神道ことはじめ, 特別連載, 「縄文文化と神道 Vol.12-竪穴住居①」, 2022年08月28日에서 인용
6) 宮本長二郎, 日本原始古代の住居建築(ISBN:4-8055-0283-5), 中央公論美術出版, 1996., pp. 110-111.
7) 宮本長二郎, 앞 책, p.111.
8) 宮本長二郎, 앞 책, p.115
9) 조몬 시기 중기 말 시기의 관동지방은 기후의 냉화(冷涼化)가 시작된 시점으로 마을의 동요나 이동이 활발했던 시기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宮代町史,通史編,第一編,原始・古代,宮代町立図書館(宮代町デジタル郷土資料)에서 인용함
10) 현대 일본인의 형성에 관한 하니하라 카즈로(埴原和郎)의 기설로, 야요이 시대 이후 동남 아시아 기원의 조몬인(縄文人)이라는 기층 집단에 북동 아시아 기원의 도래계(渡来系) 집단이 겹쳐져 혼혈됨에 따라 현대 일본인이 형성되었다는 이론이다. 이 기설은 대체적으로 수용 가능한 이론이기는 하나 기층 집단의 기원이 북동 아시아라는 의견도 여전히 강한 편이다. 馬場悠男,(株)朝日新聞出版発行「知恵蔵」, 2007.
11) 일반적으로 고지대나 구릉지 경사면에 폭 약 2미터 전후, 깊이 약 수 m에 이르는 횡혈(横穴)을 파서 그 내부에 시신을 매장한 묘를 말한다. 고대 동아시아 지역 등에서 발견되는 형식이나, 일본에서는 주로 고분시대(古墳時代)에 나타난 이 같은 형식의 묘를 지칭하는 고고학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12) 宮本 長二郎, 앞 책, p.113
13) 미야모토 나가지로의 관동지반 수혈주거 분석표(關東地方竪穴住居分析表)에 따르면, 주거 바닥에 돌을 깐 형식은 관동 지역에서 조몬 시대 증기 후엽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후기 중엽까지 발견되고 그 이전과 이후에는 발굴된 예가 없다. 이를 보면 바닥에 돌을 까는 형식은 조몬시대 후기에 한정된 독특한 수혈주거 형식으로 볼 수 있다. 宮本 長二郎, 日本原始古代の住居建築), 中央公論美術出版, 1996. p.16 表 1 내용에서 인용.
14) 国府津三ツ俣遣跡-相模湾をのぞむ集落遺跡, 小田原の辿跡探訪シリーズ6, 小田原市教育委員会, 平成23年3月2日, p.11
15) 天野 賢一, 事例報告2;川尻中村遺跡・原東遺跡, (公財)かながわ考古学財団 調査研究部 調査課, 平成26年度 考古学特別研究講座, 2014. 09, p.10
16) 후세야식 수혈주거의 가구 기본형식은 주주 사이에 도리(桁)와 들보를 걸치고 들보(梁) 상부에 합장을 조립하여 마룻대(棟木)를 지지하고 그 사이에 서까래를 설치한 형식으로 추측된다. 宮本長二郎, 앞 책, p.119
17) 宮本長二郎, 앞 책, pp.115-117
18) 조몬시대 중기에는 일반적인 집락에서는 벽립식 수혈주거는 전혀 보이지 않게 되고 후세야식 수혈주거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또한 관동지역에서 조몬시대 조기와 전기에 이미 나타난 초대형 후세야식 수혈주거도 중기에 이르러 동일본 전역에서 나타나게 된다. 宮本長二郎, 앞 책,p.119
19) 벽주(壁柱)의 배치 형식은 죠몽시대 전기에는 비교적 두껍고 균일한 재료를 1-2개의 간격으로 배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후기나 만기에 이르면 두꺼운 벽주 사이에 하나 내지 수개의 평고대(木舞)를 배치하는 등 두꺼운 재료와 가느다란 재료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사례가 중가한다. 또한 측벽 부분은 초기에는 초벽(草壁)으로 추측되나 후기나 만기의 형식은 토벽(土壁)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宮本長二郎, 앞 책,p.118
20) 宮本長二郎, 앞 책, p.115
21) 伊賀高弘, 南山城地域の弥生高地性集落についての一試考, p. 47.
22) 佐賀県, 文化課 文化財保護室, 2019年8月2日에서 인용
23) 그러나 키즈시로야마 유적(木津城山遺跡) 등에서 발굴된 야요이 시기 및 고분 시기의 수혈주거 주거상 유구 가운데 경사지에서 발굴된 유적의 경우는 방형 평면을 보이고 있으며 평지나 완만한 경사지에서 발굴된 주거지는 원형 평면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 사실을 보면 수혈주거의 평면 형식은 입지나 기술적 측면을 두루 고려하여 채택된 것을 알 수 있다. 伊賀高弘, 南山城地域の弥生高地性集落についての一試考, p. 47.
24) 홋카이도에서는 조몬 시대 조기에 4주주 형식의 수혈주거가 완성되었고 직경 혹은 한 변이 10m도 넘는 대규모의 주거나 건축물이 축조될 정도로 발달하였음을 보면 4 주주 형식은 홋카이도는 물론 카나가와를 비롯한 동북 지역의 수혈주거의 주요 기둥배치 형식이었으며 비교적 큰 규모의 수혈주거를 축조할 때 적용된 형식임을 알 수 있다. 宮本長二郎, 앞 책, p.44
25) 키타큐슈(北九州) 지역에서는 야요이 시대 후기부터 종말기(약 3세기)를 통하여 장병형의 2본 주주 형식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고분 시대 전기부터 동쪽 지역을 중심으로 4본 주주 형식이 증가하면서 고분시대 전기 후반기부터 중기 전반 기간에는 수혈 주거의 주류를 이루게 되며 카마도가 도입된 중기 후반 이후에는 카마도형 4본 주주 형식이 서일본 전체에 걸쳐 확산 정착하게 된다.重藤輝行,古墳時代の4本主柱竪穴住居と渡來人-北部九州を事例として, 제37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pp.292-293
26) 고고학계에서는 벽주가 움집 중앙의 주기둥을 보조하여 움집의상부구조(지붕)를 지탱하는 보조기둥으로 간주하여 벽주 또는 보조 주혈로 통칭하고 있다. 벽주가 설치되었던 벽주혈은 움집 중앙에 격자형 배치를 하고있는 주주혈(主柱穴)과 비교하여 몇가지 특이한 형상을드러낸다.첫째,벽주혈은 주주혈과 비교하여 직경이 작고 그 간격이 비교적 촘촘하며, 둘째 벽주혈의 단면상에 드러난 토질이 교란의 흔적이 없는 생토 그대로인 점, 셋째 벽주혈의 하단부 형상이 뾰족한 쐐기꼴을 하고있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박원호, 움집벽주(壁柱)의 흙막이벽기능에관한연구-경남지역청동기주거지를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 제17권 5호 통권60호 2008년 10월, p. 7
27) 宮本長二郎, 앞 책, p.44.
28) 宮本長二郎, 앞 책, p.116
29) 이에 대해서는 미야모토 나가지로(宮本長次郞) 같은 연구자도 조몬 시대 관동 지역의 수혈식 주거가 대형화 및 벽립식 수혈주거로 변화해가고 강수량에 따른 주거 주변의 도랑 유무 및 시대 변화에 따라 건축구조상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등 건축 규모나 동수(棟數) 및 구성방식 등의 물리적 변화가 기후 변동에 의한 문화의 재편성 결과에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溝口正人, <書評>> 日本原始古代の住居建築(宮本長二郎 著), p.222
30) 天野 賢一, 앞 책.
31) 고단계 전반에서는 장축의 길이가 약 6.1m, 중단계에서는 4.7m, 신단계에서는 평균 5.35m로 나타나고 있다. 井辺一徳, 縄文時代研究プロジェクトチーム, 神奈川における縄文時代文化の変遷VII-後期初頭期称名寺式土器文化期の様相その3 文化的様相(1), かながわの考古学, 財團法人 かながわ考古学財団, 研究紀要13, 2008.03, p.19
32) 宮代町史,通史編,第一編,原始・古代, 宮代町立図書館(宮代町デジタル郷土資料)에서 인용함
33) 神奈川県における縄文時代文化の変遷VIIIー後期前菓期 堀之内式土器文化期の様相 その 7,縄文時代研究プロジェクトチーム, かながわの考古学, 財團法人 かながわ考古学財団, 研究紀要21, 2016. 03. p.18
34) 주로 동일본 지역의 죠몽 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길이 약 20m가 넘는 초대형 건조물을 말한다. 이 지역의 33개의 유적지에서 약 90동(棟) 정도가 발견되고 있다. 건물의 용도는 불확실하나, 지금까지의 연구자의 의견을 따르면, 해당지역이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임을 고려한 동절기 공동작업장(渡辺誠)이나 공공행사나 제례를 위한 공적 공간 혹은 방문객의 숙박시설 용도(小川望・小林達雄 등)의 의견이 있다. 수혈식과 평지식의 유형이 있다.
35) 발굴된 유적에 의하면 핵가욱 전면에는 묘역(墓域)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고고학자인 이시이 히로시(石井寛) 등은 집락 내에서 제례 등을 관장한 특수한 존재나 마을의 수장 등의 지위에 있던 인물의 주거일 가능성을 지적한 바 있다. 이 같은 핵기옥은 산노마루 유적(三の丸遺跡),케쇼다이 유적 및 카미카구시마루야마 유적 등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横浜市歴史博物館, 앞 책에서 재인용
36) 小出 義治, 平安時代の考古学的研究 I; 竪穴住居の系譜とその復原的考察, 1983. p.12
37) 渋谷 文雄, 竪穴住居址の小柱穴位置について, p.27
38) 小出 義治, 앞 책, p. 13
39) 그에 따르면, 관동 지역의 조몬 전기 23개의 유적 가운데 총 93동을 주주(主柱)와 벽주(壁柱)의 유무와 평면형태 및 규모 등을 분석한 결과, 주주가 없으면서 벽주도 없는 유구(총 9동)는 평균 면적 10.1m2에 소형이고 주주는 없으나 벽주가 있는 유구(총 4동)는 평균 28.2m2로 비교적 중형 주거가 많으며 평면 형태는 주로 장방형이나 사다리꼴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주주는 없으나 벽주가 있는 16개의 유구는 평균 12.7m2에 정도의 수형주거이면서 평면 형태는 타원형이나 부정형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주주가 설치된 유구는 2본 주주의 경우, 일반적으로 장축의 직각 방향으로 2개의 주주를 설치하며 이 가운데 벽주가 없는 유구(7동)은 19.3m2, 벽주가 설치된 유구(12동)는 평균 면적 21.9m2 정도의 중규모를 보이고 있으며 평면 형태는 방형이나 장방형이나 방형 및 사다리꼴 형태 등을 보이고 있다. 4본 주주의 경우, 대부분 장방형이나 사다리꼴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단변의 벽면에 접하여 2본씩 설치되는 경우(4동)는 규모가 약 17.7m2이며 대각선 상에 주주를 배치하는 경우(4동)은 규모가 약 23.6m2의 중규모 주거로 나타나고 있다. 6본 주주는 바닥 중앙과 벽면에 각각 2본씩 설치되는 경우(4동)는 면적이 평균 약 30.7m2이며 화로쪽 기둥이 벽면으로부터 떨어져 설치되는 경우(4동)는 면적이 평균 30.7m2 그리고 단변의 기중이 모두 벽으로부터 떨어져 설치되는 경우(4동)는 면적이 평균 22.7m2의 규모를 보이고 있다. 특히 4본 주주나 6본 주주의 경우, 평면 형태는 원형이나 타원형은 나타나지 않고 대부분 장방형이나 방형 및 사다리꼴로 나타나고 있으며 주거 면적도 최소 17.7m2부터 30.7m2에 이르는 등 비교적 중규모를 이루고 있는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宮本 長二郎, 앞 책, p. 20
40) 코우즈미츠마타 유적 보고서에 따르면 카마도 중심축으로부터 약간 동쪽에 치우친 것이 서쪽에 치우쳐 설치된 형식보다 더욱 새로운 형식이라는 사실에 미루어 보면 커마도의 위치는 중앙이나 서측을 거쳐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형식으로 정착되어 가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国府津三ツ俣遣跡-相模湾をのぞむ集落遺跡, 앞 책, p.11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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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nagawa Archaeology Foundation, Kanagawa Archaeology Foundation survey report (No. 29, 47, 60, 81, 133, 157, 292, 295).

Fig. 1.

Fig. 1.
Structural type of the pit dwelling

Fig. 2.

Fig. 2.
Layout pattern between main pillar and hearthsource; Kogawa Shinichi[7] 

Fig. 3.

Fig. 3.
Shape of floor plan with the placement of pillars and hearth from Jomon period to Kohun period in Kanagawa

Fig. 4.

Fig. 4.
Distribution by size in each period in Jomon Period

Table 1.

Key Examples of pit house from Jomon period to Kohun period in Kanagawa.

Title Historical
period
Floor
shape
Pillar hole Size and
surface area
Hearth/Kamado
position
Pillar/Hearth
arrangement
Excavated
condition
(Location) Main
pillars
Wall
pillars
Babawatauchiyato Ruins
(J 2)
Jomon Early Irregular
rectangle
4/More
pieces
Inatalled 5.8m×5.2m
(30.16m2)
Almost on the centerline Symmetrical type
(Yokohama)
Kawashirinakamura
Ruins (No. 42)
Middle Round 5 Pieces Inatalled 7.74m×7.66m
(46.54m2)
Wall side on centerline Symmetrical type
(Sagamihara)
Koyasu·Ootsubo Ruins
(J 9)
Late Round 4 Pieces Inatalled 4.15m×3.15m
(10.0m2)
Entrance side on centerline Symmetrical type
(Isehara)
Aoyamakaito Ruins
(J 4)
Terminal Rectangle 4 Pieces Inatalled 5.2m×uncertain Entrance side on centerline Symmetrical type
(Sagamihara)
Nishikata A Remains
(Y 2)
Yayoi Middle round
/oval
4 or 6
Pieces
None 5.57m×4.53m
(20.2m2)
Wall side on centerline Symmetrical type
(Chigasaki)
Usukubo A Remains
(Y 10)
Late Rectangle 4 Pieces None 7.64m×6.68m
(51.0m2)
Wall side on centerline Symmetrical type
(Chigasaki)
Kouzumitsumata Ruins
(H 44)
Kohun Early Rectangle 4 Pieces None 7.1m×6.0m
(42.6m2)
Wall side on centerline Symmetrical type
(Odawara)
Yoshioka Ruins
(No. 1)
Middle/
Late
Rectangle 4 Pieces None 4.4m×4.2m
(18.48m2)
Wall side on centerline Symmetrical type
(Aya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