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초기 원시주거에 대한 입지와 평면 규모 및 형상 분석 : 구석기 시대 말기와 죠몽 시대 초창기 유적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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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Focusing on the sites of the Paleolithic period in Japan, we will define the primitive dwellings from the Paleolithic period to the beginning of the Jōmon period, before the full-fledged settlement and spread of pit dwellings, as early primitive dwellings, and summariz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such as their location and floor plan, and present basic data to grasp the prototype of primitive dwellings such as pit dwellings after the Jōmon period, when sedentary life began in earnest.
The scope of the study was limited to the Paleolithic period and the early Jōmon period, from the Paleolithic period to the Yayoi period (200 BC-250 AD) or the Kofun period, according to the generally accepted standards in Japanese historical circles. In addition, the Paleolithic-related relics were mainly consulted from related literature and the Japanese Agency for Cultural Affairs' "Statistical Data on Buried Cultural Properties", "National Antiquities Report", and the National Database of Designated Cultural Properties.
It can be assumed that the early primitive dwellings were relatively small-scale individual primitive dwellings centered on a nuclear family of about 3-5 people, and it can be seen that the early primitive dwellings from the end of the Paleolithic period when dwellings first appeared to the early Jōmon period appeared in a minimized and optimized form for hunter-gatherer life. These early primitive dwellings can be an important historical clue for understanding the prototypes of primitive dwellings centered on pit lords and high-rise dwellings in later periods, and furthermore, they have historical significance for understanding the roots and origins of Japanese architecture.
Keywords:
Early primitive dwellings in Japan., Location of Early primitive dwellings, Floor plan scale and shape analysis키워드:
일본 초기 원시주거, 초기 원시주거 입지, 평면 규모 및 형상 분석1. 서론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원시주거란 시기적으로는 주거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주택 혹은 원시시대에 나타난 주택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처음 시작된 그대로 속성이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주거를 의미한다. 원시주거는 해당 지역의 기후 풍토적 상황과 재료 및 원시 종교 등 미성숙 단계의 초기 문화적 요인을 반영한 필요 최소한의 규모나 양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 같은 이유로 해당 지역의 기후적 지리적 특징이나 문화적 정서 등이 가장 원초적이고 간결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주거로 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원시주거의 일종인 수혈주거 등이 주로 죠몽(縄文) 시대 이후에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주로 이 시기 이후의 원시주거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바 있다. 그러나 1965년 구석기 시대 말기에 해당하는 약 22,000년 전의 하사미야마 유적(はさみ山遺跡)이나 카나가와 현(神奈川県)의 타나무카이하라 유적(田名向原遺跡), 히로시마(広島県)의 니시가라라 유적(西ガララ遺跡) 등에서 이미 간단한 형태의 수혈주거 유구나 텐트 형상의 원시주거 유구가 발견됨에 따라, 일본의 원시주거 출현은 구석기 시대 말기부터 시작되어 죠몽 시대 이후 발전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1]. 특히 죠몽 시대 이후의 수혈 주거 등 원시주거를 연구한 미야모토 나가지로(宮本 長二郎)도 「일본 원시 고대의 주거건축(日本原始古代の住居建築, 1996)」의 서문에서 이미 구석기 시대 주거의 흔적이 현재까지도 계속 발견 및 발굴되는 추세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별도의 연구가 필요함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이 시기의 원시주거가 수렵 및 채집 활동을 위한 이동형 혹은 단기 거주용 주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1) 타나무카이하라 유적(田名向原遺跡)2) 등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평지에 환상으로 나뭇가지를 깔고 지면에 원추형으로 기둥을 세워 풀이나 흙으로 지붕을 덮은 평지주거(平地住居)3)나 혹은 하사미야마 유적(はさみ山遺跡)의 경우처럼 간단한 수혈주거의 형태를 띠고 있는 등 원초적인 원시주거이기는 하지만, 그 이후 죠몽시대를 거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고대 및 오늘날까지 일본의 문화와 생활상을 반영하면서 그 형태와 구법이 이어져오고 있는 대표적인 원시주거라는 점에서 주거사적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일본 구석기 시대 유적을 중심으로 수혈 주거 등 원시주거가 본격적으로 정착 및 확산하기 이전인 구석기 시대부터 죠몽 시대 초창기에 걸친 원시주거를 초기 원시주거로 규정하여 그 입지 및 평면 규모 등 건축적 특징을 정리하고, 이를 통해 정주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죠몽시대 이후의 수혈 주거 등 원시주거의 원형(原形)을 파악하기 위한 기초적 자료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일본의 초기 원시주거의 역사적 의의는 물론 후대의 원시주거와의 연결고리를 파악하는데 학술적으로 유용할 것으로 판단된다.
1.2. 연구의 범위 및 방법
본 연구는 일본 원시주거 가운데 최초로 주거가 나타난 구석기 시대 이후의 초기 원시주거를 중심으로 각각의 건축적 특징과 공간 구성 및 원시주거의 역사적 의미 등을 주로 살펴보고 있다. 주요 연구 내용과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일본 원시주거에 대한 정의 및 시대적 구분 등을 참고하여 연구 대상 시기를 구석기 말기부터 죠몽(縄文)시대 초창기로 설정하였으며 일본 원시 시대 주거에 대한 선행 연구 및 연구 방법 등 이론적인 측면에 대한 고찰을 진행하였다.
다음으로, 선사시대라는 역사적 특성 상 원시주거에 대한 당시의 기록이나 현존하는 사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구석기 시대 이후부터 죠몽 시대 초창기에 이르는 당시 원시주거의 기본적인 내용과 형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기존에 발굴된 유적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현재까지의 구석기 시대 유적 발굴 현황 등을 먼저 살펴보고, 이 가운데 주거에 대한 발굴 내용이 포함된 하사미야마 유적(はさみ山遺跡) 등 약 10개소를 선정하여 각각에서 발굴된 원시 주거 관련 내용을 정리하였다.
마지막으로, 유적에서 발굴된 원시주거 내용을 토대로 각각 입지, 평면적 특징이나 형상 등을 분석하였으며 이 밖에도 수혈 부분이나 부속공간 등 원시주거에 관련된 건축적 항목을 종합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원시주거의 건축적 특징과 후대 원시주거와의 연관성 등을 파악하였다.
연구의 시기적 범위는 일본 역사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에 따라 구석기시대부터 야요이(弥生)시대 혹은 고분(古墳) 시대까지에 이르는 원시시대 가운데 구석기시대와 죠몽 시대 초창기에 한정하였다. 이는 토기의 사용 및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구석기 말기와 죠몽 시대 초창기는 시기적으로 인접해 있어 주거의 속성 상 기존 형태나 기능 등이 후대에까지 일정 부분 이어지거나 반영될 수 있으며 또한 두 시기가 빙하기 가운데에서도 비교적 온난한 시기였기 때문에 당시 유적이 다수 발굴되고 있다는 점 등을 참고하였다. 또한 원시주거의 평면구성이나 규모 등을 비교하기 위해 죠몽 시대 초창기 이후 발굴된 원시 주거 사례도 부분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나 그 내용은 최소한에 그치고 있다. 수혈주거 등 원시주거가 본격적으로 확산 및 발전한 것으로 기록되는 죠몽 시대와 야요이 시대 및 고분 시대 등의 나머지 원시시대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를 통해 조사 및 분석하기로 한다.
또한 구석기 시대 관련 유적 자료는 주로 관련 문헌이나 일본 문화청의 「매장 문화재 통계자료(埋蔵文化財統計資料)」, 「전국유물보고총람」 및 국가지정문화재 등 데이터베이스(国指定文化財等データベース) 등을 참고하였으며 매장문화재 관련 자료는 일본의 「국가 사적(国の史蹟)」이나 각 유물 발굴 해당 지자체 및 박물관 발행 공식 자료를 인용하였다.
1.3. 선행연구 검토 및 연구 차별성
원시주거에 대한 연구는 일부 고고학적 연구를 제외하고 보면, 근현대 주거 연구와는 달리 연구자의 수효도 많지 않고 관련 자료나 유구 또한 불분명하기 때문에 건축 분야에서의 연구는 그리 활발하지 않은 실정이다. 특히 일본 수혈 주거 등 원시주거에 대한 국내 연구는 더욱 그 수효가 적으며 특히 일본 건축 연구자 또한 다른 분야에 비해 적은 수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 결과가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다. 고영훈(1992)의 ‘한국과 일본의 원시주거 형태에 관한 연구(1)’라는 연구가 있기는 하나, 그 내용이 주로 국내의 원시주거나 수혈식 주거에 한정되어 있고 후속 연구로서 일본의 원시주거에 대한 연구 결과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본 학계의 연구도 원시주거에 대한 연구도 신덴즈쿠리(寢殿造) 등의 고대 주거나 스키야 등 중 근세 주거 연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미한 편이다. 또한 원시주거에 대한 연구나 논의도 이시노 히로노부(石野博信)의 ‘일본 원시 및 고대 주거 연구(日本 原始·古代住居 硏究)’(1990)나 코이데 요시하루(小出義治)의 ‘나라·헤이안 시대의 고고학적 연구-수혈주거의 계보와 그 복원적 고찰( 奈良·平安時代の考古學的硏究-竪穴住居の系譜とその復原的考察)’(1983) 및 다카쿠라 준(高倉 純)의 ‘유적 간 변이와 이동·거주 패턴 복원의 제 문제(遺跡間 変異と移動·居住 形態復元の諸問題’(1999)처럼 대부분 고고학 분야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건축 역사 분야에서도 미야모토 나가지로(宮本 長二郎)의 ‘일본 원시 고대의 주거건축(日本原始古代の住居建築)’(1996) 등의 서적이 발간되었으나 관련 연구나 후속 연구 등이 고고학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미한 편이다. 그러나 그 동안의 관련 연구를 통해 수혈식 주거 등 원시 주거가 일본 민가나 농가의 기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으며 또한 국가나 지자체 차원에서 원시주거나 수혈주거 등에 대한 발굴이 활발한 편이고 이에 대한 자료 편찬이나 복원 사업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향후 원시주거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계속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본 연구는 우선 국내에서는 거의 다루고 있지 않은 일본 초기 원시 주거를 중심으로 각각의 건축적 특징과 상관성을 파악하고 또한 후대의 원시주거와의 상관성 및 원시건축의 원류성 등을 살펴보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으며 이를 통해 일본 주거 건축의 본질에 보다 심도있게 이해하는 이론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2. 이론적 고찰
2.1. 구석기 시대의 시기 구분
일본의 역사의 시대 구분은 학자마다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새로운 시기를 여는 획기(画期)에 대한 기준도 다르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원시 및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 가운데 원시 시대는 인류의 탄생부터 고대 노예제 사회로 이행하는 단계에 해당하며 정주(定住) 생활 여부 및 벼 농사 시작 이전과 이후 등의 기준에 따라, 구석기 시대, 죠몽(縄文) 시대, 야요이(弥生) 시대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통상 계급제도가 확립된 시기인 고분시대(古墳時代) 이전 약 3세기말까지를 통칭하고 있다(Table 1.).
구석기 시대는 지질년대로 보면 홍적세(洪積世)에 속하는 빙하시대에 해당하며 통상 전기 구석기시대(약 250만년 전~15만년 전), 중기 구석기시대(15만년 전~3만5000년 전) 및 후기 구석기시대(약 3만 5000년 전-10,000년 전)으로 구분되고 있다. 역사학적으로 구석기 시대는 조산운동(造山運動)에 의한 화산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이면서 빙하기이기도 하였던 시기였으며 음식 저장이나 조리 용도의 토기가 존재하지 않았고 주로 타제 석기를 중심으로 하는 수렵과 채집에 의한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석기 시대 후기에 들어 온난화가 시작되고 해수면이 상승하는 등 거주 환경이 개선되면서 후기 구석기시대에는 그동안의 이동 거주로부터 정주 거주로 이행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구석기시대는 원시인이 대륙으로부터 일본으로 이주해 온 무렵부터 죠몽시대(縄文時代)가 시작하는 B.C. 14,000년 경까지로 정의되며, 죠몽시대부터 사용한 토기 등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무토기시대(無土器時代)나 선 토기시대(先土器時代)로도 불리고 있다.4)
죠몽시대(縄文時代)는 토기(土器)를 사용하며 채집을 중심으로 생활한 수전도작(水田稲作) 이전의 시기를 통칭하는 것으로, 구석기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토기의 발명에 의해 정주(定住) 및 마을 형성 등 생활상의 변화가 발생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죠몽 시대는 약 1만년 이상 지속되었으나, 출토된 토기의 형식에 의해 초창기(草創期)·조기(早期)·전기(前期)·중기(中期)·후기(後期) 및 만기(晩期) 등 6개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초창기는 빙하기 가운데 약간 온난했던 시기에 해당하며, 이로 인해 과실이나 나무 열매 등 식물 식료를 안정적으로 취득할 수 있었고 점차 같은 장소에서 정주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큐슈(九州)지역부터 아오모리(青森) 지역 등 일본 열도 전체에서 당시의 유적이 디수 발견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추워지기 시작한 초창기의 끝 무렵(약 13,000년~10,000년 전)에는 발굴 유적 수가 급감하고 있다. 초창기는 죠몽 시대 그 어느 시기보다도 기후 변화가 컸던 시기이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노지리 유적(野尻遺跡)5)이나 오오시카쿠보 유적(大鹿窪遺跡)6)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복수의 주거나 집석(集石) 및 배석(配石) 등의 구조물이 배치된 집락이 형성된 시기이기도 하다.7) 죠몽시대 조기에는 기후가 재차 온난해졌기 때문에 인정적인 생활이 가능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당시의 생활구조가 확립된 시기로 볼 수 있다. 야요이 시대 등 기타 원시시대는 본 연구와 관계없기 때문에 별도의 기술은 생략하기로 한다.
건축의 역사 또한 이 같은 시대구분을 따르고 있으며, 최초 건축물인 초기 원시 주거가 나타난 시점은 구석기 시대말기부터 죠몽 시기 초창기에 이르는 기원전 2,3000년부터 1만5000년에 이르는 시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이른바 최종 빙하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기온 고저차가 심한 기후조건을 보이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침엽수림이 발달하는 등의 자연 조건이 형성되었다[3]. 미야모토 나가지로(宮本長次郞)가 죠몽 시대 관동 지역의 수혈식 주거가 대형화 및 벽립식 수혈주거로 변화해가고 강수량에 따른 주거 주변의 도랑 유무 및 시대 변화에 따라 건축구조상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등 건축 규모나 동수(棟數) 및 구성 방식 등의 물리적 변화가 기후 변동에 의한 문화의 재편성 결과8)로 해석[4]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2.2. 이동·거주 패턴 연구와 정주론(定住論)
구석기 시대에는 토기 등의 음식 저장 및 조리 용도의 유적이 발굴되지 않는 점 등으로 인하여 정주보다는 식량 사정에 따라 이동하는 이른바 수렵 채집 생활을 영위했다는 주장은 고고학적 이론이나 실제 유물 등을 통해 어느정도 객관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수렵 채집 집단의 활동 장소는 단일 지점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지리적 범위 내의 복수 지점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에 활동의 일부 흔적에 지나지 않는 단일 지점이나 유적의 분석만으로는 수렵 채집집단의 전체적인 활동상을 복원하거나 이해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특정 지점에 따라 활동 내용의 변이가 발생할 가능성을 고려하면 단일 지점(유적)에서 발굴되거나 복원된 활동의 단순한 총합이 수렵채집 집단의 전체적인 활동상이라고 볼 수 있기 어려워지기 때문에9) 이동 활동과 정주 활동을 동시에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구석기 시대를 포함한 원시시대의 생활상이나 주거 등을 연구하기 위한 다양한 이론이나 방법론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주 인용되는 것은 이동·거주 패턴(Residence-Mobility Pattern) 연구와 정주론이라 할 수 있다. 다카쿠라 준(高倉 純, 1999)에 따르면, 이동·거주 패턴 연구는 특정 지점 내의 활동(거주 활동)과 지점 간의 활동(이동 활동)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며[2] , 세틀먼트· 시스템(settlement·system)(小林 他,1971)이나 거주 구조(居住構造)(野口, 1996) 및 거주 형태 등과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주로 석기 제작 공정의 분석으로부터 유적 간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나 석기 조성의 변이로부터 유적 간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하는 흐름 등 두 가지 방향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10)
정주론(定住論)은 특정 시기 및 집단이 정주(定住)에 이르는 과 정 및 그 요인을 규명하는 연구로, 수혈주거의 흔적과 토기 및 석기 등이 다량으로 출토된 미나미 큐슈(南九州)나 미나미 칸토(南関東) 지역의 유적 자료에 근거하여 원시시대 원주민의 정주가 죠몽 시대 초창기(縄文時代 草創期)나 조기(早期)에 확립되었다는 전제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 이론은 분석 대상이 되는 유적이 어느 정도 정주에 근접하고 있는가에 논의의 초점이 맞춰지게 되며 필연적으로 정주-비정주라는 대립적 도식에 근거한 판단 기준에 따라 정주가 성립하는 메카니즘 및 그것에 대한 고고학적 해석을 판단하게 된다. 물론 이 같은 이론만으로는 정주화의 프로세스 자체에 대한 복원은 충분하지 않다[2].
이 밖에도 지형적 조건을 고려한 고고학적 분석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 고고학 등에서는 표고(高橋 誠一 등), 지형분포도(出田和久 등), 지형 분류(山賀柷子 등) 및 토양학적 토지조건(九川義広 등) 및 수계(水系) 분석(中井一夫 등)의 방법이 주로 이용되고 있다.
3. 발굴 유적에 의거한 초기 원시주거의 입지와 평면 규모 및 형상 분석
3.1. 일본 구석기 시대 유적 발굴 현황
앞 서 논한 바대로, 일본 열도의 구석기 시대 유적은 전국적으로 1만 이상의 장소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죠몽 시대(縄文時代)에 나타나는 것처럼 수십개의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은 정주 가능한 수혈주거나 평지 주거 등이 검출된 사례는 거의 드물다. 일본의 구석기 시대 유물이나 유적은 대부분 약 1만년 전에 충적된 롬 층(ローム層)11)에서 발견되는데, 화산 분출물 등으로 구성된 관동 롬층 같은 경우 강한 산성의 영향으로 당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피혁류나 목제품 등이 거의 분해되어 검출되지 않고 있으며 또한 당시 생활 특징으로 인하여 수혈주거와 같은 정주형 건축물이 자주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굴되는 구석기 시대의 유물은 석기나 파편 및 석핵(石核) 등이 주로 발굴되고 있다. 이 같은 석기 관련 유물을 통해 환상 블록 군(環状ブロック群)12) 같은 구석기 시대의 집단 캠프 등 당시 석기 작업장 등의 존재 여부나 공동 생활 등의 당시 사회상이 복원되고는 있으나 주거의 경우 아직까지는 그 정확한 실태가 규명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현재 구석기 시대 전기부터 중기에 해당하는 유적은 발굴 실적이 거의 없으며 나가노현(長野県)의 타테가하나 유적(立が鼻遺跡)에서 해당 시기에 생존했던 나우만 코끼리 등의 화석골이나 석기 등이 발굴되면서 대형 동물의 수렵이나 해체 등을 행한 장소로 여겨지고는 있으나 정확한 연대 등은 미확정 상태이다. 또한 1985년 시이기야마(椎木山) 유적에서는 약 15,000~30,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 구석기시대 중기의 석도(石刀)형 석기와 함께 수혈주거로 보이는 유구 2개가 발견된 바 있으나 아직 학술적으로 인정된 바는 없다. 반면, 구석기 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유적이나 유물은 일본 열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유적 수효도 급증하고 있다.
일본에서의 구석기 시대는 1946년 고고학자인 아이사와 타다히로(相沢忠洋)가 군마현(群馬県) 이와쥬쿠 유적(岩宿遺跡)에서 석기 조각을 발견13)하면서 그 존재 여부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바 있으며 그 이후 홋카이도(北海道)의 도코로 유적(常呂遺跡)이나 오사카(大阪)지역의 하사미야마 유적(はさみ山遺跡) 및 이나 카나가와 현(神奈川県)의 타나무카이하라 유적(田名向原遺跡) 및 오키나와(沖縄)의 사키타리 동굴유적(サキタリ洞遺跡) 등 10,150건(일본구석기학회 집계, 2010년 기준)의 유적이 발굴되면서 일본 전역에서 구석기 시대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Fig. 1.).
일본 문화청(文化庁)이 발간하는 「매장문화재 통계자료(埋蔵文化財統計資料)」(2021년 판)에 의하면, 「문화재보호법(文化財保護法)」 제93조에 정하는 매장 문화재는 472,071개의 유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2013년 3월 동 문화청이 발표한 총 매장 유적수 465,021개소보다 중가한 것으로 매년 발굴에 의해 매장문화재나 유적이 계속적으로 중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적의 종류로는 산포지(散布地)를 포함한 집락 흔적지가 196,348개로 가장 많이 발굴되고 있다. 시기별로는 죠몽시대(縄文時代)의 집락지가 91,637건으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다음으로 고대(60,667 건), 고분시대(43,268 건) 및 야요이시대(弥生時代, 35,946 건)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5].14)
또한 도쿄 문화재위크 중요문화재 특별공개보고(東京文化財ウィーク 2019, 重要文化財 特別公開報告, p.2>에 따르면 현 시점에서 최고(最古)의 죠몽시대(縄文時代) 유적은 16,500년 전의 아모모리현(青森県)의 오오다이야마모토Ⅰ(大平山元 1) 유적15)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수혈주거 등 주거지에 대한 유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우에노하라 유적(上野原遺跡)에서 발견된 유물이나 원시주거가 약 17,000년~14,0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지고 있고16) 또한 약 15,500년전의 마에다코지(前田耕地遺跡) 유적에서 죠몽시대 초창기(草創期, 13000年前~9000年前)17)의 석창 등의 유믈과 함께 주거 유적이 2건 발굴되었기 때문에 원시주거는 죠몽 시대(B.C. 약 1만 4천 년~B.C. 300년) 이전부터 존재헤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석기 시대에 한정할 경우, 일본구석기학회(日本旧石器学会)가 발간한 일본 열도의 구석기 시대 유적 데이터 베이스(日本列島の旧石器時代遺跡―日本旧石器(先土器·岩宿)時代遺跡のデータベース―, 2010)에 의하면, 일본 열도에서의 구석기시대 및 죠몽 시대 초창기(縄文時代草創期)의 유적은 각각 14,542 건과 2,526 건 등 총 16,771 건이 발굴되고 있으며 중복 문화층을 1개의 유적층으로 환산할 경우 각각 10,150건18)과 2,432건으로 나타나고 있다[6].
그러나 이 가운데 현재까지 확실하게 주거라고 판단되는 유구로는 일본 열도에서 가장 오래된 약 22,000년 전의 구석기 시대 유적으로 알려진 오사카부(大阪府)의 하사미야마 유적(はさみ山遺跡)이나 카나가와 현(神奈川県)의 타나무카이하라 유적(田名向原遺跡), 히로시마(広島県)의 니시가라라 유적(西ガララ遺跡), 키타큐슈 시(北九州市)의 시이노키야마 유적(椎木山遺跡) 등 10여 개소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의 원주민이 정주 가능한 집락을 형성하여 장기간 머물렀다기 보다는 텐트와 같은 간이 주거에 거주하면서 이동을 반복하는 유동 생활(遊動生活)을 하였기 때문에 주혈(主穴)이나 지면을 파고 들어가는 등의 작업이 필요한 건축물을 그다지 시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19) 또한 동굴주거라 해도, 도치기현(栃木県)의 오오야지 유적(大谷寺遺跡)에서 죠몽시대 초창기의 동굴주거 유적이 발굴된 사실20)을 보면 동굴주거도 필요에 따라 상당 기간 지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적의 대부분은 평지나 구릉 주변에 입지하고 있으나 거주지로서 드물게 바위 틈이나 동굴 입구 부분을 이용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원시 주거의 구조가 단순하고 땅을 파서 기둥을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석기 시대 주거 유물이 거의 발굴되지 않고 있으며 특히 주거가 처음으로 그 모습을 나타낸 구석기 시대 말기부터 죠몽시기 초장기(草創期)에 이르는 기간의 수혈주거 유적 발굴 사례는 전국 20개 유적에서 38개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 등21) 그 수효가 극히 적기 때문에 당시의 정확한 주거의 형상이나 내부 공간 등을 추측하는 것은 무리가 많은 실정이다. 수혈주거의 유적도 약 65개소에 약 300 동의 주거 흔적이 발굴된 관동지방(関東地方)에서 현저하게 많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지역에 따른 편차도 심한 편이다. 따라서 수혈 주거는 시기적 및 지역적 편차가 큰 편이기 때문에 일종의 전형(典型)이라고 할 수 있는 특정 형태나 양식을 규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수많은 발굴조사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주거의 유적이나 흔적의 발견 사례는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을 보면 당시의 일반적인 주거는 주혈과 땅을 파고 들어간 수혈 부분이 존재하는 하사미야마 유적(はさみ山遺跡)의 수혈주거 유구22)처럼, 당시 주거는 지면을 얇게 파 들어간 부분과 그 주위에 작은 주혈(柱穴)로 이루어진 간단한 수혈식 주거나 이보다 더욱 간단한 평지식(平地式) 주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23) 이 밖에도 불에 그을린 자갈 더미(礫群)나 화로 흔적(炉跡) 및 동물 수렵 등을 위한 함정 구덩이(落とし穴) 등 당시 주거 생활과 관련이 있는 유물 등이 발견되고 있으나24)[7] 당시의 주거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동경도(東京都) 내 최대 구석기 유적지로 알려진 무사시다이 유적(武蔵台遺跡)의 경우도 구석기시대 유물부터 죠몽시대 및 고대에 걸친 유물이 함께 발굴되고 있는 것처럼, 구석기 시대를 포함한 원시시대 유적은 단일 시대에 집중해서 나타나는 단순유적(単純遺跡)보다는 2개 이상의 시기에 걸쳐 나타나는 복합유적(複合遺跡)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원시 시대나 특정 시대에 한정된 원시주거를 특정하기 또한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점도 일종의 한계로 볼 수 있다.
3.2. 발굴 유적에 의거한 초기 원시주거의 입지와 평면 규모 및 형상 분석
여기에서는 유적에서 출토된 구석기 시대 및 죠몽시대 초창기 주거군 유구에 대한 입지 분석과 평면적 분석을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우선, 입지 분석은 해당 유적지가 발견된 지역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살펴보고, 이를 언덕이나 평탄 지형 및 강이나 하천 인근 입지 등으로 구분하여 각 유적의 입지적 특성을 분석하였다. 다음으로, 주거의 규모를 가능할 수 있는 자갈 더미나 주주혈(主柱穴) 및 지주혈(支柱穴) 등의 주혈(柱穴) 유적 등을 중심으로 주거 평면의 규모와 형상을 살펴보았으며, 수혈(竪穴) 부분의 유무와 깊이, 화로의 설치 여부 및 기타 저정혈 등을 부속공간의 규모 및 위치 등 주로 평면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석핵(石核) 등 주거와 작업장 간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사항 등도 참고로 고려하였다. 그러나 초기 원시주거의 형상은 해당 유구가 존재하지 않고 유적 발굴 등을 통해서도 그 정확한 형상을 파악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에 본 연구에서는 논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초기 수혈주거 유적은 객관성과 고고학적 신뢰성이 인정된 것으로 판단되는 국가 유적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았으며, 기타 국가 유적이 아니라도 수혈주거 유적에 관한 유의미한 내용을 담고 있는 유적 사례를 참고하였다. 또한 발굴된 주거 유적이 복수일 경우가 대부분이나, 그 가운데 당시 주거 규묘나 형상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결과가 수치 등으로 밝혀진 사례만을 선별하여 정리하였다. 참고로 해당 유적에서 현재까지 발굴된 주거 유적의 수자는 각 유적지 별로 괄호 안에 기입하였다.
그러나 구석기시대 혹은 죠몽 초창기 등에 해당하는 주거군의 유적 자체가 연대 측정이나 적층 분석 등 고고학적 검증에 문제가 존재할 수 있으며 실제로 2004년 당시 일본 구석기학회장이었던 오카야마(岡山)대학교의 이나다 다카시(稲田孝司) 교수가 미즈사코 유적과 우와바 유적(上場遺跡), 시이노키야마 유적(椎木山遺跡 및 고구레히가시아라야마(小暮東新山遺跡)유적 주거군에 대해서도 토층(土層) 해석에 대한 오류 등으로 인해 면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25)한 바도 있다. 본 연구에서는 초기 원시주거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이 같은 논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나, 국가 사적 등 다른 유적과의 비교를 통하여 해당 시기의 초기 원시주거에 대한 전반적인 건축적 사항을 알아보기 위해 부분적으로 인용하는 정도는 용인하고 있다. 현재 시기 등에 대한 학술적 논의가 진행되는 상기 사례에 대해서는 별도로 이탤릭체로 구분하여 표시하였다.
또한 여러 시기가 중첩적으로 발견되는 복합유적에 대해서는 구석기 시대 및 죠몽 시대 초창기에 해당하는 내용을 선별하여 정리하였다. 선정된 사례는 다음 Table 2.와 같다.
가) 입지
구석기 시대 유적 가운데 주거 흔적이 발견된 사례의 입지를 살펴보면 타나무카이하라 유적(田名向原遺跡)처럼, 대부분이 강 근처나 혹은 강을 끼고 위치하는 경우가 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입지 선정은 구석기 말기부터 죠몽 시대 초장기에 이르는 동안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사미야마 유적처럼 언덕이나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는 유적도 나타나고는 있으나, 근처에 강이나 호수 등과 인접한 구릉지였을 것으로 추측 가능하다.
이 같은 사실은 그동안 고고학자나 건축사연구자들이 주장한 수렵 채취 생활이라는 구석기 시대의 생활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타마가와(多摩川)와 그 지류인 아키가와(秋川)가 만나는 강변에 위치하고 있었던 마에다코지 유적(前田耕地遺跡)에서 수혈주거의 바닥 유적층으로부터 포유 동물과 연어(サケ) 같은 어류의 뼈가 발견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27) 또한 출입구의 위치가 서쪽이나 서북 방향을 향하고 있고 그 주변에 화덕 및 패총 등 식생활의 흔적이 집중되고 있는 죠몽 시대 전기의 노자와 유적(野沢遺跡) 집락경관 모식도(Fig. 2.)를 보면, 최소한 죠몽 시대 전기까지의 주거는 수렵이나 채취가 용이한 지역을 중심으로 일정 시기동안 간할적으로 세워졌으며 향(向)이나 방위 등에 대한 고려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앞서 말한 대로, 당시의 원주민들이 석기나 박편(剥片), 자갈(礫) 등의 석편이 집중된 지역(블록)을 중심으로 텐트 같은 간이 주거를 짓고 수렵과 채집 여건에 따라 이동을 반복하는 유동생활(遊動生活)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한편, 시바가와(芝川) 좌측 언덕에 서향으로 경사진 바탈면에 입지한 오오시카구보 유적(大鹿窪遺跡)의 경우, 기존 유적들의 입지적 특성을 계승하고 있으나, 발굴된 14동의 수혈주거 가운데 10동이 말굽형 광장을 둘러싸고 그 내부에 토갱(土坑)이나 배석(配石) 등이 위치하고 있는 집락 구조를 형성하고 있고 초기 형태의 토기가 발굴되는 등 빙하기가 끝나고 온난화가 시작된 이후 특정 장소에서 거주하는 이른바 정주화 초기의 죠몽 시대 초창기의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다.
나) 평면 규모
구석기시대 유적 가운데 원시주거나 수혈주거의 흔적이 발견된 유적을 중심으로 대략적인 평면이나 수혈부의 규모를 살펴보면, 작게는 총 13기의 주거 흔적이 발견된 미즈사코 유적(水迫遺跡)의 1.3m×1,7m나 2.2m×1.8m 정도의 소규모부터 직경 10m×10m 정도 규모의 타나무카이하라 유적(田名向原遺跡)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나, 평균적으로는 한 변 혹은 한쪽 지름이 4-5m 정도의 규모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구석기 시대 유적 가운데 하나인 하사미야마 유적(はさみ山遺跡)에서 발굴된 원시건축물의 범위는 동서 직경 약 6m, 남북 직경 약 5m, 깊이 0.3m에 이르고 있으며 그 형상은 타원형, 기둥의 개수는 13개로 추정되고 있는 등28) 비교적 큰 규모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마에다 코지 유적(前田耕地遺跡) 유적이나 니시가라라 유적(西ガララ遺跡)의 건축물 유구처럼 약 4m×3m정도의 규모를 보이고 있으며(Table. 2., Fig. 2.) 한 변과 다른 한변의 길이가 다른 부정형이나 타원형을 보이고 있다. 타나무카이하라 유적(田名向原遺跡)의 경우처럼 지름 10m 정도의 규모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는 주혈(柱穴)의 규모가 아니라 경계석(円礫)의 치수이며 그 내부에서 주혈 12기와 모닥불 흔적 2개서 등이 발견된 사실이나 주변에서 박편(剥)이나 석핵(石核) 등이 다수 발견되고 있는 사실29)을 보면, 일상적인 생활을 위한 주거라기보다는 석재작업 등 공동 작업을 위한 용도의 건축물로 추측된다.
이 같은 사실은 죠몽시대부터 근세에 이르는 복합 유적지인 「고마키유적(小牧遺跡) 발굴보고서」 가운데 Ⅶ층 및 Ⅷ층에서 발굴된 수혈주거의 규모가 수혈건물 1호의 경우, 장축 2.90m, 단축 2.16m(추정 면적 약 4.91㎡), 수혈 깊이 약 22cm이며 수혈건물 2호는 장축 1.97m, 단축 1.96m(추정 면적 약 3.86㎡), 수혈 깊이 약 13cm 등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기타 지금까지 발굴된 수혈주거 유적에 대한 일반적인 규모는 장축과 단축이 252.6cm×197.6cm (최대; 431.0cm×322.0cm, 최소 162.0cm×161cm)이고 그 면적은 평균 4.88㎡(최대 11.62㎡, 최소 2.59㎡) 등으로 보고되고 있는 것30)을 보면, 약 4m×3m정도의 규모는 오히려 대규모에 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죠몽시대(縄文時代) 조기의 수혈주거 유구가 원형의 3.15m×3.05m 규모 및 3.22m×3.15m의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 형태(見立山(2)遺跡)를 보이고 있거나31) 죠몽 시대 중기 이후의 수혈주거 유구인 노자와 유적(野沢遺跡)32) 가운데 유적 제 4호의 경우, 직경 3.8m, 5호 주거는 직경 2.7m의 원형주거33)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약 직경 약 3m-4m 정도의 평면 규모가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Fig. 2.).34)
반면, 죠몽시대 후기의 유적인 호시야 유적(星谷遺跡)에서 중앙부에 화로를 지닌 직경 약 6m의 주혈(柱穴)이 발굴된 사실을 보면 35) 후대에는 평면 규모가 조금 커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호시야 유적의 주거 유구는 벽체를 사용한 흔적이 있는 점에서 후대의 수혈주거는 벽립식(壁立式)으로 진화하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나아가 야요이 시대 및 고분 시대 등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나타난 손보 유적(曾万布遺跡)의 수혈주거 형상이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 형태 평면에 동서 5.7m, 남북 6.2m, 수혈 깊이 0.03-0.09m 등의 규모를 보이고 있으며 그 이후 6세기 경의 나가야 유적(長屋遺跡) 제1호 수혈주거군의 유적이 역시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 형태 평면에 동서 약 6.3m, 남북 약 5.8m, 수혈 깊이 0.2m의 규모를 보이고 있는 것36)과 비교하면 규모나 평면 형태 및 기둥 칸 수 등이 비교적 작은 규모인 초기 원시주거가 일정한 시기에 걸쳐 후대에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정주 생활이 본격화된 4세기 이후 기둥 칸수가 증가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37)
발굴 유적의 주거 유구 평면 및 수혈부 형태는 미즈사코 유적(水迫遺跡)에서 소규모 장방형 평면이 나타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불규칙적 원형이나 타원형을 보이고 있다(Table 2.). 그러나 거의 완전한 원에 까까운 평면 형태는 직경 10m 정도의 경계석(円礫)이 발견된 타나무카이하라 유적(田名向原遺跡)이나 고구레히가시아라야마 유적(小暮東新山遺跡)에서 직경 3m의 원형 주거 흔적 및 죠몽 시대 전기의 노자와 유적(野沢遺跡)에서 직경 3.8m와 2.7의 원형 주거 흔적이 발견되고 있으나, 전술한 바대로 타나무카이하라 유적의 경우 일상적인 주거가 아닌 것으로 보이고 고구레히가시아라야마 유적의 경우 정확하게 구석기시대의 주거로 판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경우, 실제 주거 평면에 완전한 원형을 적용하고 있는 사례는 그 수효가 많지 않다. 오히려 하사미야마 유적(6m×5m), 미즈사코 유적(1.3m×1.7m/2.2m1.8m), 니시가라라 유적(4m×3m) 및 마에다코지 유적(4.2m×3.1m) 등 대부분의 경우에서 한 변이 다른 변보다 길거나 짧은 타원이거나 부정형 원형 형태의 평면 형상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초기 원시주거의 평면 형태는 원형 가운데에서도 부정형 원형이거나 타원형이 더 자주 채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미야모토 나가지로(宮本 長二郎) 등도 연구에서 밝한 바와 같이 원시주거의 평면 형태는 ‘구석기 시대 원형 평면의 평지주거나 수혈주거에서 죠몽시대에는부정형 평면으로부터 방형이나 장방형 평면으로 정비되며 죠몽시대 전기에는 장방형 평면으부터 원형 및 타원형에 가까운 다각형 평면으로 변화하였고 후기말부터 만기(晩期)에는 평면형은 원형에서 다시금 방형으로 변화’한다[1]는 원시주거 평면 형상 변화의 최초 단계와 일치하고 있다. 또한 죠몽 시대(縄文時代) 전기의 지죠인 유적(地蔵院遺跡)의 경우, 정방형에 가깝고 장방형이라해도 장축과 단축의 비례가 짧은 형태의 방형(方形) 평면이 발견되고 있고38) 후반기 유적인 고마키 유적(小牧遺跡)에서 발굴된 수혈주거 유구의 경우, 수혈주거 유적 1호는 타원형을 보이고 있으나 수혈주거 유적 2호와 3호는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 형태를 보이고 있는 등39) 원형이나 타원형 및 방형(方形) 등이 공존하고 있었던 사실은 원시시대 후대로 갈수록 점차 다양한 평면형태가 원시주거에 채용되고 있음을 추측 가능하게 한다.
이 같은 사실을 보면, 원시시대 후기의 수혈주거의 평면 형태가 전체적으로 방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죠몽시대 중기부터 말기까지는 물론, 초기 원시주거에서는 부정형 원형이나 타원형이 평면 형태의 전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고마키 유적에서 매장이나 제례 및 의례 등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직경 55m의 환상 열석(環状列石)도 대규모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원형을 보이고 있으며 기타 화로 혹은 저장혈 등의 부속 공간도 전반적으로 원형이나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채용하고 있는 것도 당시 원시주거를 비롯한 집락 시설 및 부속공간에 원형이 자주 채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원시주거의 평면 형태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 동안의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죠몽 시대(縄文時代)에는 원형, 타원형, 방형, 장방형, 육각형 등이 나타나고 있으나 원시시대 후기인 야요이 시대(弥生時代)부터 고분 시대(古墳時代) 전기에 걸쳐서는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 형태의 평면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그 이후로는 방형에 가까운 징방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1].40)
구석기 유적에서 발굴된 원시주거의 경우, 수혈 부분의 깊이는 7-10cm 정도로 얕게 파는 경우(水迫遺跡 등)나 70cm 정도 깊게 파는 경우(上場遺跡 등)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시기적 논의가 여전히 진행중이기는 하나, 고구레히가시아라야마 유적(小暮東新山遺跡)의 경우, 직경 3m 원형 주거 내에 깊이 약 20cm의 수혈 부분이 발견되고 있으며 하사미야마 유적의 경우도 약 30cm 정도의 수혈 깊이를 보이고 있다(Table 2.). 그러나 전술한 바대로, 하사미야마 유적(はさみ山遺跡)의 주거 유구가 일반 주거라가 보다는 공동 작업장 정도의 규모임을 생각하면 일반 주거의 경우 대략 20cm 전후의 깊이가 일반적이며 또한 시기가 지날수록 그 깊이가 좀 더 깊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동안의 수혈주거 발굴조사 검출 상황 결과 수혈부의 깊이가 시대나 지역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41) 50cm나 70cm-80cm 정도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조사 결과42)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초기 원시 주거의 수혈부분은 그 깊이가 낮은 편으로, 본격적인 정주 생활을 위한 원시주거의 전(前) 단계 혹은 수렵 및 채집 등을 위한 임시 혹은 간헐적 주거로서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타나무카이하라 유적(田名向原遺跡)이나 오오시카구보 유적 및 니시가라라 유적(西ガララ遺跡) 등처럼 수혈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전술한 바대로, 이곳에서 발굴된 원시주거가 텐트나 평지주거 등 반(半) 주거용 원시주거였음을 고려하면 수혈 부분은 본격적인 정주 생활이 시작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얕게 지면을 파 내려가는 초기적 형태의 수혈부를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면에서 직경 14cm-22cm의 7개의 주혈(柱穴)과 땅을 파고 들어간 30cm 정도의 수혈 부분이 존재하는 하사미야마 유적(はさみ山遺跡)의 수혈주거 유구43)는 구석기 시대 말기의 일반적인 생활 상을 고려할 경우 희소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며 동시에 일반적인 주거라기보다는 다른 용도의 건축물일 가능성이 높다 할 수 있다.
구석기시대부터 죠몽시대 초창기에 해당하는 유적지 출토 주거 유구에서는 주혈(柱穴)이나 화로(炉), 저장혈 등이 나타나고 있다. 우선 주혈은 주거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기둥 흔적으로 대부분의 주거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주혈 부분의 크기는 최대 60cm 최소 10cm 등 주거의 규모나 사용하는 목재 등의 크기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약 10cm-20cm 정도가 자주 발견되고 있다(Table 2.). 주혈 부분의 개수는 7개부터 22개까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역시 주거의 규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로의 경우, 타나무카이하라 유적(田名向原遺跡)이나 니시가라라 유적 및 마에다코지 유적(前田耕地遺跡) 등 대부분의 주거 유구에서 발견되고 있다. 타나무카이하라 유적((90cm×65cm)이나 니사가라라 유적(65cm×55cm)의 경우처럼 명확하게 그 존재와 규모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유적의 경우, 아직 화로의 위치만 특정했을 뿐 정확한 규모와 형식은 여전히 조사 중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발굴에 따른 화로의 존재여부만 알 수 있다. 반면에 하사미야마 유적이나 우와바 유적 등의 경우처럼 화로의 존재가 발견되지 않거나 불확실한 경우도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또한 화로가 존재할 경우 그 위치도 건물 내부에 위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니시가라라유적처럼 외부에 위치하는 경우와 노자와 유적(野沢遺跡)처럼 출입구 근처에 위치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Fig. 2.). 특히 후대의 손보 유적의 경우 상설 화로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대신 저장혈(직경 약 0.7m, 깊이 약 0.2m)이 존재하고 있는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거 내부에 화로가 없을 경우는 저장혈 등 조리 관련 공간이 주거 내부에 설치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원시주거에서의 화로는 조리와 생활에 필수적인 존재였으며 죠몽 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수혈주거에서 화로가 발견되고 있음을 보면, 당시 주거가 정주용 주거라기보다는 특정 계절만 사용하는 임시용 거주이거나 특정 기간만 사용하는 반(半) 정주용 주거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장혈(貯藏穴)은 구석기 시대 말기의 니시가라라 유적이나 죠몽 시대 초창기의 오오시카쿠보 유적 등에서 나타나고 있으나 다른 유적에서는 특정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식량 저장 등에 필요한 공간인 저장혈이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사실 또한 발굴된 주거 유적이 아직 정주 생활 이전의 초기 원시주거임을 밝혀주고 있다. 주거나 특정 지역의 경계를 나타내는 자갈 더미(礫群)나 도랑 등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이 역시 정주용 주거에 필요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임시적 내지 간헐적 용도에 따른 외부 공간으로 이해 할 수 있다.
4. 결론
이상에서 일본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죠몽 시대 초창기 기간의 초기 원시주거에 대하여 그동안의 유적지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입지와 평면의 규모 및 형상 등에 대한 건축적 분석을 진행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선, 초기 원시주거의 유적 발굴 결과에 따르면, 입지는 주로 하천이나 연못 등에 인접하거나 구릉지 등을 선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정주 생활 이전인 수렵 및 채집을 위해 필수적인 장소 선정으로 볼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원시주거도 식량이나 기후 등의 변화에 따라 한 곳에서 머무르지 않거나 혹은 계절적으로 이용하는 이동적 및 간헐적 주거로서 기능하는 이동·거주 패턴 주거 혹은 집락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초기 원시주거의 규모나 형상은 약 3m-4m 정도 소규모 주거 규모에 평면 형태는 원형을 보이고 있는 경우가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수혈 부분이 존재하는 초기 수혈주거와 평지에 집을 짓는 평지주거 및 텐트 같은 간이 주거 등이 함께 나타나고 있으나 구석기시대 말기와 같이 주거가 처음 출현한 시기에는 주로 평지 주거나 간이주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수혈주거의 경우, 수혈부분이 깊지 않거나 약 20cm 전후의 깊이를 보이고 있어 후대의 수혈주거의 수혈부분보다는 상대적으로 간략하게 처리되고 있다. 기타 부분적으로 주혈(柱穴)이나 화로(炉)가 발견되고 있으나 그 규모나 개수 및 화로의 유무나 위치 등이 고정적이라기보다는 즉흥적이거나 필요에 따른 최소한의 시설이나 공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상의 사실을 보면, 초기 원시주거는 3-5인 정도의 핵가족을 중심으로하는 비교적 소규모의 개별 원시주거로 추측가능하며 주거가 최초로 출현한 구석기시대 말기를 기준으로 죠몽시대 초창기까지의 초기 원시주거는 수렵 채집 생활을 위한 최소화 및 최적화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초기 원시주거는 그 이후 시대 수혈주거나 고상주거 등을 중심으로 하는 원시주거의 원형(原形)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역사적 단서가 될 수있으며 나아가 일본 건축의 뿌리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후속 연구를 통하여 심도있게 검토하고자 한다.
그러나, 구석기 시대의 유적은 시기적으로 수만년전 이전의 유적인 관계로, 그 수효나 츨토 유구 물품의 정확성 및 당시 사회 경제적 측면을 이해할 만한 결정적 근거나 선사시대 이전이기 때문에 역사나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 및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의 구석기 유물 날조사건처럼 고고학적 발굴의 진위 등에 따른 위험성 등 다양한 고고학적 및 건축적 리스크가 존재한다. 또한 발굴된 각 주거 유적에 대한 전수 조사가 아니라 규모나 수치 등이 밝혀진 일부 사례만을 대상으로 입지나 평면 규모 등 건축적 사항을 살펴보았기 때문에 정확한 분석을 위한 표본 수가 부족한 문제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도 구석기 시대 등 선시시대에 대한 유적 발굴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기존의 유적이나 이에 대한 해석 등의 가치가 변경되거나 변질될 우려도 존재한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 자료 가운데 원시주거에 대한 기초적인 내용만을 선별하여 각 사례들의 건축물의 규모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 검토하였기 때문에 상기 고고학적 리스크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시 주거에 대한 정확한 수치나 형상 등에 대한 향후 발굴 결과나 관련 연구를 통하여 본 내용의 오류 등을 수정 및 보완할 필요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또한 초기 원시주거는 해당 시기의 생활상과 자연환경에 대응하는 최소 및 최적의 상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주거의 원류성과 함께 친환경성이나 풍토성 등의 관점에서의 후속 연구도 진행될 필요가 있다.
Acknowledgments
본 연구는 2022년 광운대학교 교내연구비 학술연구지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Notes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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