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배후도시 파주 장파리의 근대건축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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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Jangpari, located adjacent to the military border area, is a space where you can find the modernization process and transformation of Paju after the Korean War, and a place where you can look at the urbanization process of traditional villages transforming into city behind U.S. military. This study is a basic study to explore the preservation and utilization of the US camp-town in the modern era through investigation and recording of major facilities in Jangpari. Through this, it is expected to be used as basic data for research on how to enhance the historical value of the city behind the U.S. military in the modern period, preserve and utilize it.
This study was conducted based on building surveying through data collection and field surveys, and summarized the spatial and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the village. Data analysis was analyzed in-depth through verification and control processes, and finally 3D restoration was performed.
Interpreting the US camp-town in the modern period from a new perspective means a peaceful effort to heal the wounds of the past and prepare for a better future, and a process to find fundamental significance of existence to preserve the site of modern history and utilize the value of culture.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lay the foundation for regional revitalization through efforts to discover and preserve their historical and cultural values because the era and cultural heritage left behind by the U.S. military hinterland city are one of the pillars of the modernization process of the Paju area.
Keywords:
Korean War and Northern Gyeonggi Province, US Camp-town, Modern Architectural Heritage키워드:
한국전쟁과 경기북부, 미군 배후도시 (기지촌), 근대기 건축문화유산1. 서론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경기북부 휴전선 접경지역인 파주, 의정부, 동두천, 포천 등 미군 배후도시1)는 주한미군 주둔 역사와 함께 변화 · 발전되어 왔다. 한때 농촌이었던 이들 지역은 주한미군을 대상으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며 호황을 누리게 되었고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화로 사회·문화·경제적 측면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그 결과 미군 배후도시는 경기북부지역의 기지경제와 사회변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근대 문화사의 일면을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문화유산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 파주는 한국전쟁의 격전지이자, 전쟁과 함께 형성된 다수의 기지촌이 분포한 지역으로[1] 특히 파평면 장파리는 한국전쟁 직후 경기북부 농촌의 현실과 전통촌락이 미군 배후도시로 변모되어 가는 도시화 과정이 잘 남아있는 곳으로 평가된다.
장파리는 마을을 가로지른 신작로를 따라 건물이 줄지어 길게 늘어선 전형적인 가촌으로 1960년대 지어진 상가 및 식당, 다방, 여관, 교회, 위락시설 등 다수의 건물이 남아있다. 이를 통해 당시 미군 배후도시의 구조를 짐작할 수 있으며, 농업,어업,상업이 공존한 독특한 생업 방식과 마을 경관을 통해 근대기 농촌의 학술적 의의와 역사적 가치를 찾아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지촌은 도시의 산업화에서 소외되어 빠른 속도로 건축문화유산이 멸실되어가는 실정이므로 실효성 있는 정책과 관련 연구가 시급하다.
본 연구는 장파리 주요 시설물에 대한 조사를 통해 근대기 미군 배후도시 근대건축의 특성과 문화유산의 가치를 탐색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근대기 미군 배후도시의 역사적 가치 제고와 보존 및 활용방안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되길 기대한다.
1.2. 연구의 방법 및 범위
미군 배후도시는 정책적·전략적·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주둔하는 병영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발달되어 서비스업 중심의 생활권을 형성하는 군사취락[2]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중 대다수는 윤락가로 대표되거나 주로 소외된 사람들의 공간으로 묘사되어왔다. 기지촌 대부분이 1971년 미군 철수와 함께 마을 경제의 쇠락기를 거치며 방치되거나 노후화되는 양상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장파리는 농촌의 온전한 형태가 유지·보존된 사례로써 주목되는데, 특히 그 배경에는 장파리가 갖는 지리적 특성과 더불어 주민 공동체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실향민들의 정착에 대한 강한 의지와 그에 따른 결속력이 계기가 되었다. 그렇기에 장파리는 기존 미군 배후도시와 차별성을 보이는 예외적인 사례이다.
본 연구는 연구 자료 수집 및 현장조사2)를 통해 건축물 실측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마을의 공간적 특성과 건축적 특성을 정리하였다. 자료 분석은 1차 검증과 대조 과정, 그리고 2차 심층 분석을 통해 최종적으로 마을과 건축물 원형을 추적하기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되었고, 마을형성과 주요 공간에 유의미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 주요 건물은 선정하여, 3D로 복원하였다.
채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선별된 주요 건축물 13개소는 주민과의 면담과 폐쇄 자료 등3)을 통해 연혁을 특정하였고, 주민 면담은 1차 집단 면담을 거쳐 개별 면담을 진행하였다(Table 1.).4)
구술 채록 자료를 토대로 한 자료 수집과정에서 마을의 자주적인 재건 활동의 역사와 그 결과물인 건물들을 새롭게 발굴할 수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으며, 이 외 개인 소유의 공유되지 않은 자료들은 기존 정보와 대조 및 검토하여 연구에 반영하였다.
1.3. 연구 동향
‘기지촌‘을 키워드로 수집된 62개의 국내학술논문(36편)과 학위논문(26편)5)을 살펴보면 다수(44편, 81%)의 연구가 기지촌 성매매 여성 및 기지촌 환경과 정책적 사안에 집중되어, 선행된 미군 배후도시 관련 연구들이 주로 인문·사회적 현황에 주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기지촌의 취락과 환경 등 지역적 특성을 연구한 논문은 10편에 불과한데 이들 논문에서 다뤄진 지역은 동두천, 송탄, 평택 등이며 파주지역은 2편에 해당한다.
이 중 1978년 발표된 김조영의 ‘기지촌에 관한 지리학적 연구’는 미군부대 주둔으로 인한 파주지방 일대의 변천과정과 지리학적 주요 특성을 정리하였으며, 1980년 김기주는 동두천 지역의 ‘기지촌에 관한 사회지리학적연구’를 통해 미군부대 주둔으로 인하여 기지촌 주민 구성과 취락경관, 사회문화적현상이 일반취락과는 다르다고 지적하며, 기지촌 지역 취락경관 특색으로는 1. 홍수처럼 범람하는 외래 간판, 2. 각종 상점과 클럽 및 홀, 3. 무질서한 밀집 주거지와 밀림을 이루는 텔레비젼 안테나 등으로 정리하였다(Table 2. 참조).
이 후 2017~2020년에 걸쳐 지역 연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도시 및 공간에 대한 연구가 연이어 발표되었고 미군기지 이전 영향으로 미군 배후지역에 관한 연구 필요성이 강조된다.
대표적으로 2020년 강수영의 ‘미군 기지촌, 용주골의 역사적 변화: 사회경제적 공간구조를 중심으로’ 에서는 지역 차원에서 기지촌을 다시 읽어냄으로써 기지촌이 국가와 제국에 의해 지배되고 통제된 공간이라는 기존의 인식을 넘어, 마을 공간과 사람들의 일상사에 주목했고, 지역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기지촌을 복원하여 현재 시점에서 재해석하는 연구가 시도되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이 과거 기지촌에 대한 지배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고자 한 연구 경향이 두드러짐에도 불구하고 미군 배후도시의 개별 건축문화유산에 주목한 연구는 미진한 실정이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해 미군 배후도시 건축 및 의장 방식의 세부적 특성을 중심으로 그 가치를 재고하고자 한다.
2. 장파리의 형성과 역사
2.1. 경기북부 파주
임진강과 인접한 파주는 일찍부터 수로와 육로가 동시에 발달한 지역으로 17세기 이후에는 한강과 임진강변으로 상업포구와 장시6)가 활성화되어 도성과 경기 서북 및 관서 지역을 이어주는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서울과 의주를 잇는 경의선 철도와 신작로가 부설되었고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임진강 주변은 서북전선 거점 지역으로 미국 제8군의 군영지인 캠프 그리브스(Camp Greaves)가 주둔하게 된다.
미군 주둔 역사는 장파리 형성과 쇠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마을과 미군기지를 연결하는 리비교와 중앙로의 개설은 마을의 변화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마을 역사는 시기적으로 미군부대가 형성된 직후인 형성기와 마을 확장기인 번영기를(1950~1960년대)를 지나 미군철수와 함께 시작된 정체기(1970~1980년대), 그리고 미군 철수가 완료 이후 지속된 쇠락기(1990년대 이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2.2. 한국전쟁과 임진강 교각의 건설
1951년 7월 휴전협정 당시, 전투지역으로 계속된 보급로가 필요했던 미군은 임진강에 '자유의 다리'를 포함해 모두 11개7) 교량을 설치한다. 그러나 교량들이 임진강 홍수에 유실되는 등 사고가 반복되자, 미군 제1군단 사령관은 1952년 9월, 적성지역 2곳에 반영구적인 교량을 설치하기로 하고 '틸교'는 잠수교로 리비교의 전신인 'X-ray교'는 영구교량으로 건설한다8).
‘리비교’란 명칭은 6·25전쟁 초기에 대전 전투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부대원을 구한 조지 D. 리비(George D. Libby) 중사를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졌으며, 파평면 장파리에서 진동면 용산리를 잇는 콘크리트 교량으로 총연장 328m, 폭 11.9m 의 규모9)이며 1952년 10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약 9개월이 걸려 건설되었다.[3]
완공 직후 사진(Fig. 4.)과 이듬해인 1954년 촬영된 항공사진을 통해 건설 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10)
리비교와 이어지는 중앙로는 북쪽 보조도로와 비교할 때 1.5배 이상 넓어 탱크와 장갑차를 비롯한 대형 수송차량의 통행이 가능한데, 실제 위성사진을 통해 뚜렷하게 확인되는 리비교와 중앙로의 관계는 주변도로와 비교되는 넓이와 형태로 긴밀한 관계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Fig. 5.). 즉, 리비교의 건설과 중앙로의 형성은 당위적 결과로 해석되어야 하며, 결과적으로 장파리의 형성과 재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65년 미군 제1기병사단(1st Cavalry Division)에 제공된 DMZ 지도에서도 리비교와 장파리(CHANGPA-RI)의 위치는 명확하게 확인된다. 이 또한 리비교와 장파리의 관계가 지리적으로 매우 밀접하고도 중요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Figs. 6., 7.).
리비교는 미군에 의해 임진강에 건설된 다리 중 가장 오랜 기간 사용되어 한국전쟁의 역사적 산물이자 민통선을 잇는 유일한 다리로 지역주민 생계와 삶을 이어주던 시간과 공간의 연결로로서 의미가 크다. 리비교 완공 이후 임진강 건너 JSA(공동경비구역)에 주둔하던 28연대 공병대와 미24사단 보병대대 외에도 수많은 미군들이 장파리로 유입되는 통로가 되었다. 그 결과 장파리에는 미군과 관련된 서비스업과 부대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자원과 물자를 취급하는 비공식적인 경제가 발전하였으며 유흥시설의 확대와 외지인들의 이주가 본격화되자 경제 및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 마을은 호황을 누리게 된다.
2.3. 장파리 공간 구조
1913년 토지조사사업11)으로 파악된 장파리 모습은 주거지 위치가 임진강에서 멀리 떨어져 동쪽으로 길게 이어진 하천을 따라 분포하며 한국전쟁 이전 도로 및 도랑의 형상은 지금과 크게 다르다(Fig. 8. 참조).
전쟁 전후로 접경 마을의 이주와 정착 과정에서 인구 증가는 주거지 확장과 이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장파리는 마을주민의 49%가 농업으로 생계를 꾸릴 정도로 농업 의존도가 높은 동시에 임진강을 배경으로 어업과 상업이 발달하여 마을 소득과 상가 형성이 번성할 수 있었던 지리적 이점이 있는 곳이다.
장파리의 독특한 마을 구조는 생업의 공간과 주거영역이 혼재되어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음에도 경작지가 거주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과거 전통마을에서 나타나는 위계적 공간구성을 따르기보다 교통권과 생활권을 중심으로 주거지와 상가 영역이 구분된 특징이 있고, 유동인구가 많은 도로변에는 상권이 형성되어 그 배후에 주거지가 들어선 상업공간과 주거지가 혼재된 모습이다. 따라서 마을 경관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마을을 동서로 나누어 관통하고 있는 중앙로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마을에 중앙로가 개설된 후 그 일대가 농지로 개간되면서 주거지 이전과 확대, 상권 형성 등 도시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마을 경관 역시 크게 변모하게 된다.
특히 마을형성 초기에 지어진 주요 건축물 대부분은 미군 주도의 건설공사이거나 미군 자본 또는 기술력에 상당 부분 의존한 사례인데 종교시설(교회와 성당)과, 의료시설(개인병원과 보건소), 위락시설(클럽바), 교육시설(재건중학교)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은 건설과정에서 미군의 직접적인 원조와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12)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장파리의 중심 권역은 리비교를 건너 라스트찬스로 이어지는 교차로 주변으로 현재 장파성당과 평화의원, DMZ 클럽이 위치한 장파1리 일대에 해당한다(Fig. 9. 참조). 장파1리는 2리에 비해 원주민 거주비율이 높은 구역으로 마을 형성기 이후 번영기까지 중앙로 및 주거지의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 특징이 있다.
1960년대 말 클럽바의 수가 늘어나면서 상권이 확대되었고, 외지인들의 유입이 본격화되면서 미군을 상대하는 서비스업종 외에도 내국인 대상 문화시설(극장과 음악다방)들이 다양하게 들어선다. 이 결과 마을 경제 및 상업 발달과 함께 급격하게 증가한 인구밀도를 해소하기 위해 상업지구와 주거지역의 기능을 동시에 수용하는 마을 구조가 구축되기에 이른다.
1971년 미군 철수로 자연스럽게 상권이 축소되었고 기지촌에 대한 부정적 사회 시선으로 도심이 쇠락되면서 마을 경제와 상권은 와해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장파리는 농촌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겪는데, 때마침 시행된 새마을운동으로 대대적인 취락개선 사업이 시행되면서 도로 및 주요 건물들이 보수되거나 개조되었다.
더불어 1960~70년대 수도권으로 연결된 버스노선이 신설되면서 시외버스터미널을 기점으로 장파리를 찾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고 중앙로는 마을 중흥기를 견인한 매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또한 당시에는 버스가 장파2리에서 회차하여 장파1리까지 운행하지 않았던 관계로 자연스럽게 1리와 2리는 구분된 생활권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시외버스터미널 주변에는 극장, 여관, 다방, 클럽 등의 유흥시설을 비롯하여 교회와 학교, 정미소, 목욕탕 등 생활기반 시설들이 밀집되어 있었는데, 특히 재건중학교 교사동은 미군의 원조로 시작된 개화사업의 일환으로 남은 대표적인 건물13)로 마을형성 초기에 미군공병대대의 지원을 받아 건립되었다. 이 외에도 현재는 철거되었지만 마을 목욕탕과 매춘여성의 집단숙소 등도 주변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장파 1리와 2리는 건축물의 규모와 수법 등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1리는 전통농가와 더불어 건실한 형태의 건물들이 주로 분포하였던 반면, 2리는 시공 방법이 복잡하지 않고 외관과 형태를 쉽게 바꾸기 유리한 구조의 상점과 주거 기능이 혼합된 시멘트블록조의 열악한 주거건축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3. 장파리 근대건축 고찰
3.1. 건축 재료의 수급과 제작
1950년대 시멘트 원료 보급14)과 유통은 원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멘트는 민간의 건설현장에서 매우 귀한 재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60년대 장파리에 세워진 건물 대부분은 시멘트블록 조적식 구조이며 블록 제조과정에서 임진강변에서 채취한 모래가 사용되었다.
정밀조사를 통해 파악된 장파리의 주요 건축물 16개소(소실된 사례 3개소를 포함)15)를 살펴보면, 근대 한옥에 해당되는 2개소를 제외하고 모든 경우가 시멘트블록 또는 시멘트 벽돌을 사용한 조적식 건물이다(Fig. 10. 참조).
특히 라스트찬스와 DMZ, 럭키바에서 사용된 시멘트블록은 비교적 균일한 입자의 재료가 사용되어 견고한 형태로 파악되었는데, 이는 재건중학교 건물과 비교하였을 때 사용된 블록의 규격 및 입자 등이 구별되고, 정미소를 포함한 민간 건축물에 사용된 시멘트블록과는 확연한 균질성 차이를 보인다.
마을에서 비교적 규모 있는 건물 중 대표적인 사례를 통해 시멘트 블록의 크기와 형태를 비교하면 대체로 치수가 규격화된 8인치_390㎜(W)×190㎜(H)×190㎜(D)의 오차범위에 있는 것들이 다수이다(Fig. 11. 참조).
다만 재건중학교와 정미소 경우에는 시멘트블록 폭이 다소 작게 제작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특히 정미소에 사용된 블록은 일대 상가와 주택에서도 조사된 바 있는 블록 규격과 유사하며, 그 형태가 조잡하고 입자가 큰 모래를 사용하여 균일한 형태를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조악한 형태의 시멘트 블록은 숙련도가 떨어지는 주민들에 의해 제작 및 유통되었던 마을형성 초기 것들로 파악된다.
미군 원조를 통한 자재 수급의 기록은 당시 발행된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일부 확인되는데, 장파리로 유입된 상당수의 건축 자재가 미군을 통해 지원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963년 12월 25일자 발행된 기사16)에는 장파리를 ‘자매부락’ 이라 표현하며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한 선물로 ‘30만원 상당의 건축자재’를 언급하고 있다(Fig. 12. 참조).
미군들은 건축자재 외에도 주민들에게 건설기술과 장비, 차량을 지원해주었고, 주민들은 미군의 지원과 함께 자급적 노력으로 재원을 마련하였다. 미군을 통해 마을로 유통된 많은 재화 중에서 특히 건축자재의 의존도가 높았고, 주요 건물들은 미군의 도움으로 건축되었다. 이때 공사에 참여한 인부 대부분 마을주민이거나 한국인 기술자들17)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4].
그렇게 1960년대 후반에는 자주적으로 건축 붐이 일어났고, 이러한 변화는 미군 배후도시의 모습에서 새로운 산업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전환점이 되었다. 민간주도의 건축 행위가 자리 잡은 이후 전수 기술을 바탕으로 원조 시멘트와 임진강변 모레를 섞어 만든 건축자재가 제작, 유통되었으며 시공에 이르는 일련의 공사과정에 주민들이 자주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18).
장파리에서 확인된 시멘트블록에 관한 자료는 민간 기술자에 의해 생산되어 사용되었기에 매우 중요한 사료로써 의미가 있다.
해당 사례들을 통해 당시 건축 자재의 생산과 유통에 대한 폭넓은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근대기 경기도 지역의 건축산업의 흐름을 헤아릴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3.2. 중앙로 상가건축의 유형
중앙로를 따라 시대의 유행을 빠르게 반영한 음악다방, 극장, 여관, 식당 등 화려한 외관으로 장식한 위락시설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가로에서 정면이 좁고 폭이 긴 세장한 형태로 빼곡히 들어서서 도로변 경관을 형성하였다.
이때 줄지어 이어진 상가의 모습은 전면 외벽이 지붕 슬래브 위로 솟아 상점의 간판 구실을 하는 파사드의 특징적인 면을 보인다.
이 형태는 일본의 간판건축19)과 매우 유사한데,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하는 후기20) 간판건축 계열이다. 이는 건물 전면 폭이 좁고 안쪽으로 깊게 구성된 평면의 특징상 박공면이 정면이 되는 동시에 전면 파사드를 지지하는 형식을 말한다.
이 외에도 Fig. 14.와 같이 슬래브 지붕 위로 난간벽을 설치하여 마치 전면 벽체와 일체화된 형태도 확인되는데, 구조적으로 보면 난간벽을 세우는 방식은 좁고 높게 구성된 전면 벽체를 지지하는 방식보다 안정적인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입면으로 전면 파사드를 통일성과 일체성 있게 꾸미고 있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파사드 디자인은 비슷한 재료를 사용하거나, 돌출된 외벽, 또는 난간벽을 출입구와 분리하여 장식하는 방식으로 주로 타일, 벽돌, 돌 등이 재료로 사용되었는데, 상점마다 개성있는 방식으로 특색있는 입면을 구성하였다.
전통적으로 지붕면 방향을 정면으로 인식해온 우리 문화에서 한옥 상점은 도로와 나란하게 용마루와 처마선이 오도록 건물을 앉혀 정면을 구성하는 반면, 상권 밀도가 높은 도로변 상가는 전면 폭이 좁고 내부가 깊어진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상점 일부는 경계벽을 공유하는 형태로 한 몸체를 이루거나 길이를 각기 다르게 구성하는 등 상점 면적이나 깊이, 내부 구조에 있어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모습이다.
지붕을 구성하는 방식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1. 전면 가벽 상부로부터 배면 벽체로 이어진 경사지붕을 두어 삼각형의 측벽(14개소)을 구성하거나, 2. 박공면을 정면에 두어 가벽을 지지하고 맞배지붕을 올리는 경우(11개소), 3. 평지붕 형태로 슬래브 위로 난간벽(8개소)을 세우는 형태를 보인다21).
그 중에서도 삼각형의 측벽을 구성하는 ‘부섭지붕’의 형태가 가장 많으며(42%), 이러한 형태는 상점 출입 공간을 높게 형성할 수 있어 전면부는 상점으로 사용하고 천정이 낮은 뒷공간에는 방을 내어 생활공간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장점이 있어 보다 많은 사례에서 조사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3. 미군 클럽의 건축 양식
미군 클럽바는 장파리 내에서 7개소22) 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현재는 그 중 3개소(라스트찬스23), DMZ, 럭키바)만 남아있다.
이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축된 것으로 파악된 ‘DMZ bar(1962년)‘는 골목 안쪽에 자리잡아 건물 모퉁이에 비교적 옹색한 출입구를 둔 이색적인 형식이다. 그럼에도 건실한 벽체와 트러스 지붕 구조가 잘 보존되어 과거의 규모 있는 댄스홀을 짐작할 수 있으며 외벽 마감과 온전하게 남아있는 벽체 장식은 라스트찬스와 유사하여 당시 유행의 형식으로도 추측된다.
럭키바는 1960~70년대 마을 중심부였던 장파2리 시외버스터미널 뒤편에 위치하며 7개 클럽바 중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한다. 존치된 미군클럽 중에서는 유일하게 클럽바와 연계된 홀하우스24) 건물이 남아있어 미군위안부 숙소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건물이다.
클럽은 모두 시멘트블록 조적식 구조로 기둥 상부에는 왕대공 트러스 (king post truss)를 올려 박공지붕을 구성하였다(Fig. 16. 참조). 클럽 운영 당시에는 천장 반자가 시공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으나, 라스트찬스와 DMZ 클럽은 내부 공간을 사용하면서 천장을 철거하여 트러스가 노출된 상태이다.
라스트찬스에는 전면부를 제외하고 배면 박공면까지 2370㎜ 간격으로 트러스 7개가 사용되었으며, 트러스 하현재(평보)는 150㎜×90㎜ 크기 각목을 이용하여 대략 9,100㎜ 경간으로 제작되었다. 반면 DMZ 클럽 트러스 경간은 ≒10,200㎜ 이고, 럭키바의 경우는 ≒12,800㎜ 로 가장 큰 트러스가 사용되었다.
미군 클럽에서 사용된 트러스는 모두 왕대공과 빗대공, 달대공으로 구성된 King Post Truss 로, 빗대공의 경사방향이 중심부하단을 향하는 형태이다. 또한 빗대공 이음부가 수평보가 아닌 왕대공에 감잡이쇠로 결속되어 나무판으로 덧대 보강하였다.
이는 민간 기술자를 통해 세워진 방앗간, 학교, 교회, 상가 등과 긴결 수법과 차이를 보여 구별되는데, 이들 건물에서 사용된 트러스는 대개 빗대공이 달대공을 따라 수평보에 직접 긴결되며, 빗대공 경사방향이 중심부 상단을 향한 형식으로 보다 간결한 방식이다(Fig. 17. 참조).
한편 클럽바 외벽 마감 방식과 내부 벽면 부조 및 바닥 타일 등에서는 당시 유행한 재료와 양식 등이 표현되어 있어 주목된다.
클럽바 대부분은 정면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다양한 장식을 덧붙였는데, 라스트찬스는 지붕 박공면에 약 6m의 외벽을 붙이고 조약돌을 사용하여 모자이크 치장하거나(Fig. 18.) 출입구 기둥과 외벽을 자연석으로 마감하여 내민줄눈 방식으로 시공함으로써 독특한 외관을 구성하였다(Fig. 19.).
한편 럭키바와 문나이트 등은 별도의 출입구를 돌출시켜 Bar로 이어지는 복도와 현관을 두었다. 이렇듯 클럽바의 입면은 출입구가 부각된 공통적 특징을 나타내는데 이는 건물 차별화와 정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보인다.
실내 역시 시멘트를 사용하여 성경의 한 장면이나 여인상 등 기하학적 무늬 따위를 도드라지게 새겨 벽체를 장식하였는데 인근 다방 등 유흥시설에서도 동종의 장식이 사용된 바 있다.
내부 바닥은 1960~70년대 초반까지 다수의 건축물에서 적용된 일명 ‘도끼다시(とぎだし)26)’ 방식인 테라조(terazzo)27) 마감이다. 특히 모르타르 색에 변화를 주며 다양한 패턴을 구성하거나 색깔 있는 돌, 유리, 금속을 종석(chips)으로 넣어 장식하고 홀 바닥은 격자무늬로 색을 넣어 스페이드 등의 트럼프 무늬를 새기기도 하였다(Fig. 22. 참조).
3.4. 근대 농가의 특징
마을에 남아 있는 농가들은 경기북부지역 농가 타입의 전형적인28) 형식이나[6] 바깥채는 외양간이나, 헛간, 광 등의 공간을 방으로 개조하고 크기를 가능한 작게 쪼개어 수를 늘리는 형식이 다수 조사되었다(Fig. 23. 참조).
일부는 외벽에 간이형 주방을 덧달아내거나 전면 툇마루에 칸막이를 설치하여 세대를 구분하는 독립적인 면이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바깥채가 내실화된 변화에는 1960년대 농업보다 상업이 발달하였던 마을 상황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호황기의 마을은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이 넘쳐나던 시기로 집집마다 키우던 소를 팔고 외양간을 수리하여 세를 받는 것이 훨씬 돈이 되던 시절이었다. 특히 양공주라 불리던 직업여성들과 저소득층의 사람들이 적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달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기존 농가의 한옥을 상점으로 개조한 일명 한옥상점도 근대기 건축물의 특색이 묻어 있다(Fig. 24.29)).
콘크리트 상가들과 구별되는 한옥상점은 주거기능을 갖추면서 상업공간을 도입한 모습이 특징적이다. 이들은 외벽 유리문을 달고 정면에 출입문을 두었으며, 전면부를 채색하거나 유리문에 글자를 적어넣는 등 상점을 돋보이게 표현한 모습이 특징적이다.
상점은 대략 정면 3~4칸 측면 2~2.5칸의 ㄱ자 혹은 ㅡ 자형 평면으로 ㄴ자형 안채와 함께 口자 형태로 배치된다(Fig. 24.).
상가 전면 미닫이 유리문은 대체로 기둥 사이에 3짝이 설치되는데 근대기 농가의 주간 폭이 평균 2450㎜~2650㎜인 것을 고려하면 미닫이문 한 짝은 대략 750㎜ 내외 폭이다.
현재 마을에 남아 있는 한옥상점은 많은 부분이 변형되어 원형에 대한 추정이 어렵고 마을정화 사업을 통해 상당 부분이 개조되거나 대부분 철거되었다. 그렇기에 채집된 소수의 사례는 근대기 경기도 농가 및 한옥상점 변화의 형성과정과 평면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사료로 중요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3.5. 철근콘크리트조 중층상가
1960년대 지어진 상가 건물 대부분은 주로 시멘트블록을 이용한 조적식 단층 구조이나, 몇몇 중층형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건축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3동만이 남아 있으나 주민 인터뷰와 사진 자료 등을 통해 6개 사료가 최종 수집되었다.
이들 중층 건물은 평화의원30), 주점, 평강상회31), 클럽바 홀하우스, 장파극장32) 으로, 다수 인원을 수용하기 위한 유흥시설 또는 상업시설로 파악되었다(Table 3. 참조).
가장 이른 시기에 건축된 평강상회(1960년)를 비롯하여 럭키바 홀하우스(1965년) 및 주점(미상), 극장(1967년 추정)은 장파2리 시외버스터미널 주변으로 집중되어 분포하였는데, 교통과 유동인구, 상가 규모 등을 미루어 볼 때 이 일대가 1960년대 마을 가장 중심 권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들 건물의 1층은 도로변에서 출입하고 2층으로는 외부 계단을 두어 1층과 2층이 별도의 출입구를 구성하는 특징을 보인다.
클럽바 홀하우스에서도 정면과 배면으로 구분된 출입구와 외부 계단을 통해 1층을 거치지 않고 2층으로 이동하는 구조로 파악되었으며, 이는 각 층을 다른 용도로 이용하고자 한 의도가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중층상가는 장식이 절제된 직관적인 파사드를 구성하는데, 기둥과 슬라브를 입면에 도드라진 모습으로 돌출시켜 수직성을 강조한 일면이 있다. 이는 벽체를 구성할 때 내측 기둥 열에 맞추어 외벽을 세우면서 연출된 당연한 결과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내부는 기둥과 내벽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내실을 만들 수 있지만, 벽체 구성은 실내 면적이 좁아지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상당 부분 의도적으로 계획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평화의원 역시 같은 의도에서 정면의 기둥을 돌출시킨 형태로 보아 외관을 눈에 띄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된다.
기둥을 외벽으로 돌출하여 부각시킨 입면구성은 중층형 뿐만아니라 성당이나 교회, (재건중)학교에서도 보이는데, 이는 격식을 갖추기 위함과 더불어 채광과 조망에 유리한 개구부를 구성하기 위한 합리적인 해결방식으로도 볼 수 있다(Fig. 27.).
반면, 클럽바에 귀속되어 매춘을 위한 장소로 운영되었던 홀하우스는 작게 나누어진 방들이 일렬로 배치된 평면으로 단순하게 외관을 처리하였는데, 외벽은 시멘트 벽돌을 쌓아 올린 벽체에 페인트로 마감하였고 창문 하나를 기준으로 하나의 방이 구성되는 형식임을 내벽의 흔적을 통해 알 수 있다. (Fig. 28.34)참조)
4. 결론
장파리는 마을 주요 핵심공간이자 리비교로 이어진 중앙로를 중심으로 미군클럽과 성당, 교회, 여관, 다방, 세탁소, 상점 등 지역의 생활사와 근대기 조적식 건축물이 보존되어있는 역사적 공간이며, 활용 가치를 높게 평가할 수 있는 건축자산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지촌이란 부정적인 선입견에 가려져 오랫동안 저평가되어 왔으며, 근래의 가속화된 도시화로 인해 한국전쟁 접경지역의 특수한 역사와 문화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근대기 미군 배후도시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해 내는 것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평화적 노력이자 근대기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고 문화의 가치를 활용하기 위한 근본적인 존재의의를 찾아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미군 배후도시가 남긴 시대상과 당시의 문화유산은 파주지역의 근대화 과정의 한 축을 차지하기에 이들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노력을 통해 지역 활성화의 기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를 통해 장파리의 공간적 특징과 건축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임진강변 긴 언덕을 따라 조성된 입지 특성은 독특한 생업 환경과 마을 경관에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으며, 리비교 건설과 함께 중앙로 개설은 미군 배후도시로의 변모를 알리는 시작점이 되어 급속한 도시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둘째, 전쟁 직후 마을 재건 과정에서 미군을 통한 건축원료의 수급과 건설기술 전수는 마을 기술자들을 통해 제작, 발전되었으며 새로운 산업으로 확대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주요 건축물에 사용된 시멘트블록은 자재 규격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로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셋째, 단층 상가 다수는 삼각형 측벽과 부섭지붕을 올린 구조로, 처마를 두지 않고 전면 외벽을 높고 평평하게 올려 간판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 특징이 있으며 이는 일본의 후기 간판건축 형식과 매우 유사하다.
넷째, 1960년대 미군클럽바에 사용된 왕대공 트러스 구조는 당시 대경간의 공간을 구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는데, 트러스를 구성하는 부재의 결합 형식에 있어 민간 방식과 차이를 보여 주목된다. 또한 실내장식에 사용된 조소의 다양한 기법과 주변에서 채집한 자연재료를 이용한 의장적 표현의 심미성이 두드러진다.
다섯째, 농가 형식은 경기북부 전통농가의 전형적인 공간구성을 따르되 영농방식과 농가 경제 변화에 따라 개조된 양상을 보인다. 특히 한옥 상점과 같이 주거와 상가의 기능이 혼재된 사례는 근대기 농가의 다양한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사료로써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여섯째, 현재 마을에 남아있는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중층형 건물은 비록 소수에 불과하나, 현재까지도 거리의 경관구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 건물들은 공통적으로 장식이 절제된 직관적인 파사드로 눈에 띄는 외관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 중층 건물들과 함께 비교될 수 있는 사례로 평가될 가치가 있다.
향후 장파리를 비롯하여 경기북부지역에 산재한 미군 배후도시를 역사문화공간으로 재평가하는 과정은 반드시 수행되어야 할 과제이며, 연구의 연속성을 고려하여 연구의 범위를 타지역으로 확장시켜 나간다면 보다 풍부한 연구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본 연구가 지역 개발 사업에서 제한적이었던 근대기 미군 배후도시가 정체성을 회복하고 지역재생 활성화의 대표적 모델로 개발되기 위한 후속 연구로 이어지길 바란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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