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묘 차(大名茶) 차실(茶室)의 평면 구성 비교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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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o entirely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 of Japanese tea room, it is needed to grasp the spiritual and aesthetic points inherent in the way of tea activities. After the death of Sen Rikyu, the initiator of Wabi- cha and Soan tea room, the flow of the way of tea activities(Chado) in early Edo period was being kept by the Daimyo-cha influenced by Sen Rikyu. Main purpose of this study is focused on the comparative analysis on to the composition in floor plan of Daimyo tea room in Early Edo Period.
To analyze the composition of tea room in Daimyo-cha, the method to composite tea room determined by the number of tatami, placement of Toko and Ro etc was adopted. Main examples selected in this study are En-nan, Jyo-an, Mittan and Korin-an which made by Huruta Oribe, Oda Urakusai, Kobori Enshu and Katakiri Sekishu individually.
This study reveals that the composition of tea room in Daimyo-cha has a common characteristics in showing small size tea room(koma) under the 4.5tatami and adopting daime formation in host seat though the appearance in Toko and Ro are different pattern case by case. This result is enough to show the relationship between Sen Rikyu and Daimyo-cha in wabi-cha sprit and make a turning point from koma style tea room to shouin style tea room and sukiya architecture suitable for Edo and modern period.
Keywords:
Japanese Daimyocha, Japanese Daimyocha-chasitzu, Composition of Floor Plan키워드:
다이묘차(大名茶), 다이묘차 차실, 평면 구성1. 서론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805년 사이초(最澄)와 806년 구카이(空海) 등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처음으로 차(茶)가 도입되었던 헤이안(平安)시대만 해도 차를 마시는 문화는 승려나 귀족 계층 일부분에 한정적으로 유행되었다. 그러나 에이사이(栄西, 1141-1215)가 송나라로부터 말차(抹茶) 제조법을 전래한 카마구라(鎌倉)시대에 이르러 차를 마시는 법식이나 문화를 나타내는 다도(茶道)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무로마치(室町) 시대에 무가(武家) 계층을 중심으로 다도가 확산되었다. 이후 에도(江戶) 시대에 이르러 귀족이나 무사 및 승려는 물론 일반 서민까지 확산되면서 보편적이고 일본적인 차 문화가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다.
이 같은 흐름은 일본에서의 차 문화가 초기에는 중국 문화의 일부분으로 수용되다가 점차 일본의 독자적인 문화 가운데 하나로 정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차를 배타적인 귀족문화로부터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차 문화로 전환시키는 데에 일조한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 같은 차인(茶人)과 이를 지지하고 수용한 쇼군(將軍)이나 다이묘(大名) 등 무사 계층의 존재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 가운데 센노리큐 사후 그의 제자 가운데 한명인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와 당시 에도 막부(江戶幕府)의 다이묘들이 주도한 다이묘 차(大名茶)는 센노리큐의 와비 차(侘び茶)의 철학이나 다도를 계승하면서도 에도 시대의 새로운 사회 질서나 계급의식을 접목한 다도로, 기존의 쇼인 차(書院の茶)나 와비차로 대표되는 소안 풍 차실(草庵風茶室)의 특징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면서 새로운 사회질서에 적합한 형태나 형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한편으로는 기존의 와비 차의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에도(江戶)라는 사회 질서에 적합한 새로운 다도의 필요성을 반영한 새로운 개념의 차실 건축의 성립으로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암 풍 차실에 머물러 있던 당시의 차실 건축을 기존의 쇼인즈꾸리(書院造)와 결합된 고급 및 격식 지향의 스키야풍 쇼인(數奇屋風書院)이라는 양식으로 발전시킨 역사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센노리큐 사후 다도나 차실 건축에서 중요한 변화가 발생한 에도시대 초기 다이묘 차(大名茶)의 특징을 살펴보고 그 역사적 위상에 대한 검토와 함께 대표적인 다이묘 차의 차실 건축을 중심으로 평면구성 특징 등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차실에 있어서의 변화 및 특징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진행하고자 한다.
1.2. 연구의 범위 및 방법
본 연구에서는 에도 시대 초기 다이묘 차(大名茶)에 대한 정의와 특징에 대한 검토부터 시작하여 각 다이묘들의 차에 대한 미의식이나 철학이 반영된 차실의 공간구성 특징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주요 연구 방법 및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다이묘 차 출현 배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에도 시대 이전과 에도 시대 초기의 시대적 상황과 차실 건축의 변화 등을 고찰하였으며 센노리큐 사후 전개된 다도의 흐름이나 각각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다이묘 차의 대표적 인물 가운데 에도 시대 초기 다이묘이면서 차실 건축을 설계하거나 관여한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 고보리 엔슈(小堀遠州) 및 카타기리 세끼슈(片桐石州) 등을 선정하고 이들의 차실 건축 가운데 실체 파악이 가능하고 도면 등의 학술 자료가 존재하는 엔난(燕庵), 밋탄(密庵) 및 고린안(高林庵)을 각각 분석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여기에 당시 막부의 쇼군(將軍)의 다도 사범은 아니지만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동생이면서 당시 유력한 무사계층이었던 오다 우락사이(織田有楽斎)와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조안(如庵)을 추가하여 당시 다이묘를 포함한 무사계급의 다도 및 차실건축의 평면구성 특징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상기 사례에 대하여 규모, 로(炉)나 도꼬(床)의 위치관계 등을 중심으로 차실의 평면 구성(間取り)을 비교 분석하였다.
또한 상기 연구를 위하여 주로 문헌을 중심으로 자료를 수집 및 정리하였으며 그 주요 내용별 참고 문헌이나 선행연구는 다음과 같다. 우선 다이묘차에 대한 시대적 배경이나 이론적 특징 등에 대해서는「大名茶の系譜」(安部直樹, 2007)나「에도(江戸)시대 무가 다도와 다쿠앙 소호(澤庵宗彭)의 연관성」(김대영, 2017), 「고보리 엔슈(小堀遠州)에 관한 고찰」(신혜원, 2006)등의 연구를 참고하였으며, 개별 차실 건물의 평면이나 도면 등은 건설도해사전(建設圖解事典, 建築資料硏究社, 2016) 등의 도집이나 관련 해당 웹사이트 자료를 수집 및 활용하였다. 또한 다이묘 차의 사례들에서 센노리큐의 다도나 와비 차의 영향이 계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필요한 부분에 한정하여 「소안 차시쯔(草庵茶室) 타이안(待庵)의 축소 지향성」(김영훈, 2021) 등의 선행 연구를 참고하였다.
그리고 본 논문의 성격상 인물이나 차실(茶室) 관련 용어 등 고유명사나 전문 용어는 국립어학원 일본어 표기 규정을 참고하면서 가능한 한 원어에 충실하게 표기하였으며 필요한 경우 그 뜻이나 의미는 미주를 통해 설명하였다.
2. 다이묘 차(大名茶) 이해를 위한 몇 가지 전제
2.1. 다이묘 차 발생의 시대적 배경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와 1614년 및 1615년 두 차례에 걸친 오사카진(大阪の陣)의 승리로 도요토미(豐臣) 가문의 모모야마(桃山) 시대는 종식을 고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에도(江戶) 시대가 시작된다. 에도시대는 일본의 근세에 해당하는 기간으로 모모야마 시대까지 이어져 오던 전쟁이나 전란이 종식된 평화의 시기였으며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한 대폭적인 변혁이 일어난 시기로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변화는 막부의 쇼군(將軍)이나 무사계층 등의 지배계급과 일반 서민 등의 피지배계급의 명확한 신분적 질서가 확립되었다는 사실과 사회 질서나 군신 관계 등을 위해 유교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전쟁이 사라져 전공에 따른 영지의 분할이나 봉록의 수여 등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가마쿠라(鎌倉) 시대부터 사회적 지배계층으로 성장하였던 무사계급에 대한 충성과 이를 위한 통제가 필요했기 때문에 에도막부는 유교를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여 막번 체제(幕藩體制)를 통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한편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의 제정이나 오나리(御成)1) 등의 의식을 통해 무사들을 직접 통제하는 정책을 전개하게 된다. 특히 오나리 행사는 일반적으로 주연과 다회(茶會)가 함께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쇼군이나 다이묘 등의 무사계급이 다도를 필수적인 교양이나 교류 수단으로 활용하게 된다.[1]
다이묘 차(大名茶)의 발생은 이 같은 사회적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다이묘 차는 사전적으로는 에도(江戸) 시대 봉록이 1만 석 이상 부케(武家)인 다이묘(大名)들이 주도한 다도를 말하며 부케차(武家茶)라고도 한다.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차와 다도는 무사계층 및 구케(公家), 쵸닌(町人), 승려 등의 폭넓은 지지층을 지니고 있었으며 센노리큐(千利休)가 와비차 철학을 다도에 반영하면서 다도와 차실 건축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등 차 문화의 전성기를 개척하였으나, 에도(江戸) 시대에 접어들고 각각의 신분 차가 엄격해지면서 다도를 행하는 주체에 따라 각각의 다도도 그 성격에 미묘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2.2. 에도시대 이전까지의 차실 건축의 흐름 개관
일본에서 차를 마시는 습관은 역사기록상 불교가 전래된 헤이안(平安)시기부터 시작되고 있으나 주로 왕실이나 승려 중심의 국한적인 다도에 머물고 있었다. 이어 카마구라(鎌倉)시대에는 선종 사상의 유입과 함께 차를 마시는 풍습이 확산되었으며 무로마찌(室町) 시대에는 쇼인(書院)이나 다다미가 깔려져 있는 접객 공간인 히로마(広間) 및 일본 전통 시인 렌가(連歌) 공연 등이 펼쳐지던 카이쇼(会所) 등2)을 중심으로 차가 제공되는 등 차 문화가 당시 무사 계층을 중심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차실 건축의 경우, 차가 본격적으로 일본화 되기 시작한 무로마치(室町)시대에는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긴카쿠지(銀閣寺)의 예에서 보이는 것처럼, 기존의 쇼인즈꾸리(書院造)와 결합된 차실이 나타나게 되었다.3) 주로 무사계급에 의해 행해지던 다도는 당시 그들의 주거 형태인 쇼인즈꾸리 내의 다다미를 깐 객실의 일종인 히로마(広間)나 쇼인(書院)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쇼인 차(書院の茶)라는 다도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특히 히로마는 대부분 다다미 4조반 이상의 규모로 지어진 공적 공간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로 인해 쇼인 차는 주로 4조 반 이상의 대규모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다도를 의미하게 되었다. 일례로 무로마찌도노(室町殿)의 난꼬카이쇼(南向会所)를 보면, 9조(畳) 규모의 메인 자시키(主座敷) 내측 편에 키타노차토도꼬로(北之茶湯所)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차를 준비하여 자시키로 가져갔음을 알 수 있다. [Fig. 1.] 또한 보키에고토바(慕帰絵詞, 1351) 제 5권에서 당시카이쇼(会所)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시키 옆에 위치한 방에는 다양한 차완(茶碗)이나 차를 내리는 도구가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자시키로 차를 나르고 있는 승려들이 그려져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는 유흥이나 향연을 위한 장소에서 차가 제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후일 이 같은 자시키(座敷)에 도꼬(床), 타나(棚), 츠케쇼인(付書院) 등이 구비된 쇼인즈꾸리(書院造)로 정착하여 정형화 되어가면서 쇼인 차(書院の茶)라는 차 문화가 확산되었다. 쇼인 차에서는 차 도구(茶道具)나 장식물로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차완(茶碗), 서화 및 도구 등 이른바 카라모노(唐物)가 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일본의 차 문화가 중국문화와 선종(禅宗)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걸쳐 도시에 거주하면서도 산중의 정취를 느끼는 이른바 ‘시츄노산쿄(市中の山居)’를 지향하는 소안 차(草庵の茶), 즉 와비차(侘び茶)로 변화하면서 소박함과 절제미를 강조한 차실이 나타나게 된다. [4]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 보면, 에도 시기 이전까지는 차를 마시는 문화는 주로 당시 귀족사회를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던 중국 문화에 대한 수용과 향유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서의 차실은 자연스럽게 귀족이나 무사 계층의 쇼인즈꾸리에 부속되면서 쇼인 차(書院の茶)로 발전하였으며 그 이후 귀족적이고 격식 중심의 차실에서 탈피하여 좁고 어두운 극소 공간이나 소박함과 정신적인 와비(侘び) 등을 특징으로 하는 소안 차(草庵の茶)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다이묘 차(大名茶)의 발생과 특징
3.1. 에도시대 초기 다도의 흐름
아베 나오키(安部直樹)의 연구(2007)에 따르면, 센노리큐 사후인 에도(江戶)시대 초기에 이르러서는 그의 와비차의 개념을 계승하는 쵸닌노차(町人の茶), 다이묘(大名)에 의한 다이묘차(大名茶) 및 가나모리 소와(金森宗和) 등에 의한 궁정차(宮庭茶)로 그 유형과 계보가 세분화되면서 폭넓은 발전을 이루게 된다.[2] 이 같은 분류는 에도 시대 이전까지 다도를 주도하던 와비 차 혹은 센노리큐의 영향 관계에 의한 것으로 주로 그의 사후에 전개된 다도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
이 같은 흐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게 되는 것이 다이묘 차(大名茶)이다. 앞의 선행연구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센노리큐의 와비 차는 아즈찌 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의 무사계급에 수용되면서 확산되었으며, 그 결과 가모 우지사또(蒲生氏郷)나 호소카와 타다오끼(細川三斎) 등과 같은 무사나 다이묘(大名)로 이루어진 7제자(利休七哲)4)를 배출함으로써 와비 차의 다도를 계승하게 된다. 그러나 극소 공간 내에서의 절제된 긴장감이나 신분질서 타파 등을 강조한 센노리큐의 다도 정신은 에도시대의 새로운 사회질서나 계급의식을 반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그의 제자를 비롯한 새로운 다이묘들은 의례와 사교에 적합한 새로운 다도를 만들어 낼 필요성에 직면하였다. 특히 에도막부에 들어와 다회가 오나리(御成)와 같은 의례행사나 사교의 장으로 이용되면서 다도는 다이묘들에게 필수적 소양이 되었으며 이를 위해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적고 이전의 차실보다는 밝고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다도의 성격 또한 이들 다이묘들의 신분과 목적에 부합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5) 그 결과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 등의 다이묘들이 와비 차의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에도시대의 새로운 사회 질서나 계급의식을 반영한 새로운 양식의 다이묘 차6) 계보를 형성하게 된다.
다이묘 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다도를 지도했던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7), 고보리 엔슈(小堀遠州) 및 카타기리 세끼슈(片桐石州) 등의 다이묘 다인(大名茶人)의 다도 및 다풍(茶風)으로 정의할 수 있다. 다이묘 차는 당시 각지의 번(藩)이나 다이묘(大名) 별로 각자의 공식적인 의식(流儀)이 정해져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특정 영지 내에서만 통용되는 유파도 있었기 때문에 그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힘들다. 에도시대부터 이에모토(家元)8)제도를 채택하고 있던 쵸닌 차(町人の茶)와 달리, 다이묘 차의 경우는 특정 지역의 번주(藩主)가 이에모토(家元)에 해당하는 존재이면서 다이묘 스스로가 다도를 관장하는 경우나 혹은 다도에 필요한 실무를 차토(茶頭)에게 일임하는 경우 등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쵸닌 차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상이한 부분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에도 초기의 승려인 세이간 소이(清巌宗渭)9)의 다도서인 <清巌禅師茶事十六ヶ条>라는 책에 유력 다이묘의 차(大名有力の茶)라는 용어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센노리큐의 제자나 후손들에 유행하던 쵸닌 차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다이묘 차를 규정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다이묘가 근본적으로는 무가에 속하기 때문에 다이묘 차의 다도는 부케사도(武家茶道)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이 가운데 에도막부(江戶幕府)인 쇼군케(將軍家)에서 행해지는 다도를 류에이사도(柳営茶道)라는 용어로 별도로 칭하고 있다. 류에이사도(柳営茶道)는 에도시대 초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시기부터 시작되어 후대에 걸쳐 계속 이어졌으며, 최초 쇼군인 이에야스와 2대 쇼군인 히데타다(秀忠)의 다도를 관장한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의 오리베류(織部流), 3대 쇼군인 이에미쯔(家光) 시기의 고보리 엔슈(小堀遠州)의 엔슈류(遠州流) 및 4대 도쿠가와 이에쯔나(家網) 시대의 카타기리 세끼슈(片桐石州)의 세끼슈류(石州流) 등의 다도로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다이묘 차는 에도시대라는 새로운 사회질서나 막번 체제(幕藩体制)에 상응하는 새로운 다도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기존의 센노리큐 등에 의해 주도된 와비 차 철학이나 다도 등에도 새로운 시대적 니즈에 대응 가능한 변화의 필요성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나타난 시대적 산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쵸닌 차(町人の茶)는 에도 중기 경제적 부흥에 힘입어 부유한 쵸닌(町人)들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되자 센노리큐의 후손인 센 소탄(千宗旦) 등에 의한 산센케(三千家)10)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11) 이는 손님을 대접할 때 나타나는 마음의 아름다움12)이나 화경청적(和敬清寂)13) 정신 등 다도의 본질이나 센노리큐의 철학을 계승하는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쵸닌 차는 이에모토(家元) 제도의 확립 및 시찌지시끼(七事式)14) 등을 통하여 다도를 일본 전역으로 보급하는데 기여하게 되는데, 주로 무사계급이 아닌 마을의 촌장이나 막부 직할지의 장(名主) 및 상인 등이 주요 계층이었다는 점에서 다이묘 차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2]
궁정 차는 공가(公家)에서 행해진 다도를 말하는 것으로, 궁정이나 공가나 황실의 속성상 폐쇄성과 익명성이 강하기 때문에 다도가 행해진 범위나 내용이 제한적인 특징이 있다. 궁정차에서는 족자는 명, 청대의 회화나 고필을 선호하였으며 다기나 도자기는 닌와야끼(仁和燒) 등 귀족 취향의 다기 등이 사용되었으나 궁중 특유의 폐쇄성으로 인하여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2]
이상의 세 가지 다도의 흐름은 기본적으로는 센노리큐의 와비 차 철학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다도의 성격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다이묘 차의 시작은 후루타 오리베로부터 시작되나 그는 이미 센노리큐의 제자였기 때문에 와비 차의 많은 부분을 다이묘 차에 적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나 폐쇄성이 강한 궁정차를 주도하였던 가나모리 소와(金森宗和)가 후루타 오리베나 고보리 엔슈의 영향을 받았으며 센노리큐의 아들인 센 도안(千道安)과도 관계15)가 있었음을 고려할 경우, 당시의 각각의 다도는 그것의 주최자나 주요 대상 및 다풍(茶風) 등의 미묘한 차이에 의한 분류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Fig. 2.]
특히 이 같은 흐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와비 차의 성격의 변화로 볼 수 있다. 센노리큐 등에 의해 완성된 와비 차는 본래 선(禪)과 마음의 평화 등을 추구하였던 속성이었으나 아즈찌 모모야마 시대를 거치면서 무사정권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에도시대에는 부를 축적한 상인(町人)들의 문화로 활용되는 등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다양한 성격이 부가되었으며 주로 무사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한 무사 문화의 하나로 정착되고 있었다.16) 이 같은 사실은 에도시대 초기의 다이묘차가 발전하게 된 주요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3.2. 주요 다이묘 차 개요
일반적으로 일본의 다도를 논할 때 가장 먼저 열거되는 이름이 센노리큐(千利休)이고 다실(茶室) 또한 그가 완성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신혜원(2006)에 따르면, 다도는 그의 사후에도 계속 변화 및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의 연구에 의하면, 모모야마시대로부터 에도시대로 이행되면서 다실은 물론 성곽이나 주택 등의 건축방식이 크게 변화하였고 다실의 경우도 에도시기 초기에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와 오다 우라쿠사이(織田有樂齊) 및 고보리 엔슈(小堀遠州) 등이 기존의 센노리큐의 다실을 경쾌하고 밝으며 약간 여유 있게 설계하거나 실내를 구성하는 면(面)의 패턴을 흥미롭게 꾸미기 시작하면서 후일 다실의 기본적인 패턴을 정립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러한 다실의 변화는 본래 다실과 대립의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던 쇼인즈꾸리(書院造)를 다실에 어울리게 변화시켰으며 결과적으로는 스키야즈꾸리(數寄屋造)의 성립을 가져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6]
다이묘 차는 센노리큐 사후 리큐의 7제자(利休七哲)가운데 한명인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에 의해 일차적으로 완성되며 그 뒤를 이어 고보리 엔슈(小堀遠州) 및 카타기리 세끼슈(片桐石州)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을 보이면서 발전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쇼군(將軍)의 다도 사범을 역임한 다이묘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이른바 부케사도(武家茶道)나 류에이사도(柳営茶道)를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다이묘 차의 주요 인물로서 상기 3인의 기본적인 철학 등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의 대표적인 차실건축을 중심으로 그 건축적 특징을 분석하는 것은 당시 다이묘 차의 기본적인 특성을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본 논문이 다이묘 차의 차실 건축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상기 3인 이외에 죠안(如庵) 등의 차실건축을 남기는 등 다이묘 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되는 오다 우락사이(織田有楽斎)를 논의에 추가하고자 한다. 이들 모두는 당시의 다이묘나 무사이면서 센노리큐의 다도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차실 건축에 있어서 중요한 작품을 남긴 인물로 평가된다는 점에서 논의의 가치는 충분하다 할 수 있다. 이들의 개략적인 소개와 차풍(茶風) 등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1543-1615)는 전국시대부터 에도시대 초기에 걸쳐 무장, 다이묘(大名), 차인(茶人) 및 예술가로 활동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차당(茶堂)에 관여하고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의 다도를 지도 감독하였으며 쇼군의 영접을 위한 특별한 다도로서 ‘스키야오나리’를 창시하였다. 이를 통해 후루타 오리베는 공간과 다법에 있어서도 무로마치시대의 쇼인 차(書院茶) 즉 다이스(台子)차를 복원하여 센노리큐의 와비 차에 접목하였으며 그 결과 서원(書院)과 다실을 병합하여 스키야(数寄屋: 다실)에서 차를 마시고서 ‘구사리노마(鎖の間)’를 통해 서원으로 이동하여 향연을 즐기는 식의 다회를 제안하였다. 고자시키(小座敷)와 서원의 중간 격인 구사리노마를 설치하여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한 다회를 연출이 가능하게 하였으며 다실 내부도 센노리큐의 좁고 어두운 다실을 탈피하여 내부 공간을 넓히고 창을 다수 배치하여 밝고 외향적 다실을 만들어내는 한편 종자(從者)들을 위한 쇼반세키(相伴席)를 별도로 설치하는 등 신분적 위계질서까지 고려한 차실 평면을 완성하였다.[1]
오리베의 다도는 스승인 센노리큐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자유로운 창조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센노리큐가 추구하였던 와비차의 다도가 정작 무사 태동기의 시기에는 선호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와비 차에 파격을 가미한 다도를 창시하였으며 그 결과 당시 유행하던 이풍이체(異風異体)적인 가부끼(かぶき) 정신을 그의 다도 내로 끌어 들여 독특하고 언밸런스적인 취향의 다도를 만들어내었다. 특히 오리베야키(織部焼)로 총칭되는 독특한 색 조합과 비정형의 비틀어지고 삐뚤어진 파격적이고 특이한 형태의 의장을 다도구에 도입을 하였는데 후루타 오리베의 이러한 독특한 미의식에 대해 당시 ‘효게모노(へうげもの)’란 평을 받았다.[1] 그 결과 그는 ‘사람들과는 다른 것을 하라’는 센노리큐의 가르침에 따라 센노리큐가 추구하였던 정밀함(静謐)과는 대조적인 이른바 오리베류(織部流)라 불리는 파조의 미(破調の美)를 창조하게 된다.17) 오리베 취향(織部好み)의 대표적인 차실로는 정토사(淨土寺)의 로적암(露滴庵), 야부노우찌류(藪内流)의 엔난(燕庵) 등이 있다.
다음으로 오다 우락사이(織田有楽斎, 1547-1621)는 아즈찌 모모야마(安土桃山) 및 에도(江戸) 초기의 무사이면서 차인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동생인 오다 나가마스(織田長益)로 알려져 있으며 센노리큐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다. 혼노지 사변(本能寺の変)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 무사로 활동하였으며 센노리큐 사후 우락류(有楽流)라는 계파를 창시하였다. 스승은 다께노 조오(武野紹鴎)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센노리큐의 제자이기도 하였으며 이른바 센노리큐의 10제자(利休十哲)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시 도꾸가와 이에야스 측에 속해 있었으나 그 이후도 요도도노(淀殿)와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의 후계자적 입장에서 도요토미 가문에 출입하면서 겐닌지(建仁寺)에 부속된 소사원인 쇼덴인(正伝院)을 재건하였으며, 그 안에 자신의 차실인 죠안(如庵)을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보리 엔슈(小堀遠州, 1579-1647)는 아즈찌 모모야마 시대의 다이묘이자 차인이면서 건축가, 조경가 및 서가(書家)이기도 하다. 또한 2대 빗츄노구니(備中国) 다이칸(代官)이면서 마쯔야마 성주(備中松山城主)이었으며 후일 오미고무로한(近江小室藩)의 초대 영주였다. 처음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가신이었으나 후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막부의 다이묘가 되었으며 제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다도 사범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후루타 오리베의 다도를 기본으로 하면서 센노리큐 다도의 전통을 접목하고자 하였으나 스승인 후루타 오리베의 파격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보다는 새롭고 안정된 시대에 적합한 사회적 신분질서의 반영과 아름답고 균형 잡힌 다도를 추구하는 이른바 키레이사비(きれいさび)라는 미의식을 창조하였다.[1] 이는 센노리큐의 와비차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보다 균형을 중시하고 세련됨을 추구하여 왕조 문화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차실 건축으로는 오리베의 차실보다 창문을 더 많은 총 13개의 창문을 설치하여 내부를 밝게 한 요스이테이(擁翠亭)와 현재 국보인 밋탄(密庵)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카타기리 세끼슈(片桐石州,1605-1673)는 에도시대 초기 야마토 고이즈미(大和小泉) 성주이자 다이묘(大名)로, 제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徳川家綱)의 다도 사범이기도 하다. 센노리큐의 장남 센 도안(千道安)의 다도를 계승한 구와야마 사다하루(桑山貞晴)로부터 다도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그는 봉건적 사유를 탈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와비의 이념을 다도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그가 추구한 다도는 기존의 후루타 오리베나 고보리 엔슈의 다도를 참고하면서도 부케(武家) 이념, 즉 주종관계가 명확한 신분 상응의 다도 내에 센노리큐의 와비의 개념을 부활시킨 다도로 알려져 있다.18).[3] 1663년 경내 전체가 하나의 차실로 지어진 지코인(慈光院)을 통해 정문으로부터 로지 및 차실에 이르는 종합적인 차실 건축을 실현하였으며 1671년 지코인의 서원 한쪽에 고린안(高林庵)이라는 2조 다이메(二畳台目) 규모의 차실을 증축하였다.
4. 다이묘차(大名茶) 차실의 평면 구성 비교 분석
4.1. 다이묘차 차실 비교 분석 대상 선정
상기 3.2에서 논의한 다이묘 차의 차실 건축 가운데 현존하거나 도면 및 사진 등으로 파악 가능한 건축물 및 각각의 다이묘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차실 건축을 대상으로 비교 및 분석을 하였으며 그 개요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엔난(燕庵)은 야부노우찌케(藪内家)를 대표하는 차실로 오사카진(大坂の陣)에 출정하는 후루타 오라베(古田織部)가 처남인 야부노우찌케(藪内家)의 켄츄(剣仲)에게 수여한 차실로 알려져 있다. 1864년 전쟁으로 소실되었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은 볼 수는 없으나 1867년 다케다 키에몬(武田儀右衛門)이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외형은 카야부끼(茅葺) 마감의 이리모야즈꾸리(入母屋造)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동쪽의 도마히사시(土間庇)에 면하여 니지리구찌(躙口)가 설치되어 있다. 3조(三畳) 크기의 손님자리(客座)를 사이에 두고 테마에자(点前座)와 쇼반세끼(相伴席)를 배치하고 있다. 손님자리(客座)의 경계 부분에는 2장짜리 후스마(二枚襖)를 사이에 두고 쇼반세끼(相伴席)를 추가로 설치한 점이 엔난의 최대의 특징이며 이 같은 형식은 특히 무사계층에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이 많이 설치된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이며 테마에자(点前座)의 부엌 부분의 색지창(色紙窓)을 포함하여 모두 10개의 창이 설치되어 있다. 보꾸세끼마도(墨蹟窓)19)의 시다지(下地)부분의 대나무에 꽃걸이용 못(花入れの釘)을 박거나 히바리다나(雲雀棚)로 불리는 우에다나(上棚)의 길쭉한 쯔리다나(釣棚) 형식 등도 오리베 특유의 의장으로 볼 수 있다.20)
1618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동생인 오다 우락사이(織田有楽斎)가 교토(京都) 겐닌지(建仁寺) 경내의 쇼덴인(正伝院)을 부흥시키면서 축조한 차실로, 1951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고케라부끼(杮葺き) 마감의 지붕은 이리모야(入母屋) 풍의 처마를 정면으로 설치하여 센노리큐의 타이안(待庵)과는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차실의 규모는 2조반 다이메(二畳半台目)의 무꼬기리(向切り)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정면 좌측에 돌출 벽(袖壁)를 지닌 도마히사시(土間庇)를 설치하여 이를 통해 우측의 니지리구찌(躙り口)와 정면의 대기 공간(控えの間)으로 어프로치가 이루어진다. 니지리구찌를 들어가서 좌측 안쪽에 4척(尺)규모의 데도꼬(出床)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오른쪽 안쪽으로 캇테구찌(勝手口) 입구가 설치되어 있다. 차도구찌와 규지구찌(給仕口)21)를 겸하는 이 갓테구찌부터 잔 심부름을 하는 급사(給仕)의 동선에 따라 사면으로 벽이 세워져 있으며 그 주변에는 삼각형의 판 다다미인 우로꼬이타(鱗板)가 깔려있다.
갓테구찌로 입구 앞에 위치한 다이메 다다미(台目畳) 부분이 주인 자리(亭主座)이며 그 옆에는 차 대접에 사용되는 다도구류를 수납하는 미닫이 형식의 도고(道庫/洞庫)가 위치한다. 도꼬노마(床の間)는 주인의 오른쪽 후방에 위치하나 자시끼 내부 실내로 돌출된 형태의 데도꼬(出床)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거리적으로는 거의 붙어 있는 정도이다. 주인 자리의 풍로(風炉) 앞에 기둥(中柱)을 세우고 판벽으로 구획하고 있다. 이 기둥과 판벽으로 풍로 앞쪽에 있는 다다미 반조(半畳)의 쇼반세끼(相伴席)를 주인 공간과 구획함과 동시에 하부를 동그랗게 뚫은 보이드(吹き通し)로 처리함으로써 주빈(主賓)이 데리고 다니는 동반자에 대한 고려도 놓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공간의 구성은 앞서 말한 삼각형의 판 다다미인 우로꼬이타(鱗板)와 함께 차실건축에서는 이례적인 공간 구성으로 센노리큐의 7제자와는 격이 다른 오다 우락사이(織田有楽斎)만의 기량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차실 앞부분의 히사시(庇) 아래의 실내공간은 지붕 경사 그대로 서까래를 노출시킨 케쇼노기우라(化粧軒裏)의 카케고미 텐조(掛け込み天井)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천정 중앙 부분에는 돌출 창(突き上げ窓)이 설치되어 있다. 벽면에는 모두 5개의 창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하나는 돌출 벽(袖壁)이 있는 도마히사시(土間庇) 부분을 향하고 있다. 남측 2개소에는 직사광선을 피하기 위한 창이, 동측에는 창 외부에 시노다케(篠竹)를 촘촘히 채워 넣은 우락마도(有楽窓)가 2개소에 설치되어 있다. 이로 인해 실내로 유입되는 빛의 양은 충분하지 않게 되는데 우락사이는 이를 천정에 설치된 돌출창이 보강하는 방식으로 구성하였으며 오히려 주위의 창으로부터 유입되는 빛의 양을 압축함으로써 천창으로부터 유입되는 빛의 효과를 보다 극적인 것으로 연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차실에 부속되어 있는 캇테노마(勝手の間)는 3조(三畳)로 로(炉)와 미즈야(水屋)22)가 구비되어 있으며 무소마도(無双窓)가 설치되어 있다. 이 밖에도 오래된 달력(古暦)을 중간에 붙인 고요미바리(暦張り) 등도 우락사이의 창의적인 발상이 엿보이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밋탄(密庵)은 교토 다이도꾸지(大徳寺)의 별원(塔頭)인 류코인(竜光院)의 서원(書院)건축물에 접속되어 지어진 4조반 다이메(四畳半台目)의 차실로 고보리 엔슈(小堀遠州)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타이안(待庵) 및 죠안(如庵)과 함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17세기 전반 에도시대 초기에 지어진 차실로 건물 형상은 요세무네즈꾸리(寄棟造)에 고케라부끼 마감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별동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며23) 2면에 걸쳐 복도(縁)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코(床), 치가이 다나(違い棚) 및 쇼인도코(書院床) 등을 구비한 4조반(四畳半) 차실에 나까바시라(中柱)24)와 돌출 벽(袖壁)가 설치된 다이메(台目) 구조의 테마에자(点前座)가 부가되어 있는 형식의 차실이다. 서쪽 복도 쪽의 문을 아까리쇼지(明障子) 남쪽은 후스마(襖)로 공간을 구획하고 동북 측에 테마에자(手前座) 및 북측 벽에 서쪽으로 치우쳐 도꼬(床)가 설치되어 있다. 밋탄은 규모가 큰 서원 건축의 일부로 구성되고 있기 때문에25) 차실 건축에서 일반적으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니지리구찌는 보이지 않으며 남측의 후스마 부분을 통하여 진출입하는 형식을 보이고 있다.
차실 내부의 도꼬(床)는 2개소에 설치되어 있다. 하나는 일반적인 차실에서 보이는 손님자리(客座) 쪽에 위치한 치가이다나(違棚) 옆에 설치된 것으로 검게 칠한 도꼬가마찌(床框)와 종이나 천을 바른 벽(張付壁)으로 마감된 게자도꼬(下座床)26) 형식의 도꼬(床)이며 다른 하나는 다이메(台目) 부분에 설치된 밋탄도꼬(密庵床) 혹은 쇼인도코(書院床)가 추가로 설치되어 있다. 이는 류코인(竜光院) 전래의 밋탄 선사(密庵禅師)의 묵적(墨蹟)이 일반 묵적보다 크기가 크고 형상이 길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폭은 좁고 길이는 길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차실 내에 도꼬(床)를 2개소에 설치한 경우는 거의 그 전례가 없기 때문에 밋탄 특유의 공간적 특징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치가이 다나(違い棚)의 마꾸이타(幕板)27)에는 고보리 엔슈 특유의 도안인 마쯔카와비시(松皮菱) 문양28)과 싯뽀쯔나기(七宝つなぎ) 등이 투각(透彫)되어 있다. 기둥은 네 모서리 부분만 나무껍질을 남겨두는 멘가와(面皮), 통나무(丸太) 및 각주(角柱) 등을 섞어서 사용하였으며 일부에는 나게시(長押)를 설치하여 못 머리 부분을 감추기 위한 장식인 구기카쿠시(釘隠)를 사용하였다. 벽은 수묵화가 그려진 하리쯔케가베(張付壁)를 사용하는 등 전체적으로 쇼인즈꾸리(書院造)의 의장 요소를 기조로 하고 있다.
그러나 다테마에자(点前座)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낮게 설치된 오또시 텐조(落天井)로 처리하고 있으며 그곳에 설치된 나까바시라(中柱)에는 자귀로 다듬은 자국(釿目)을 그대로 보여주는 스기 통나무(杉丸太)를 사용하는 등 적절한 재료와 그에 따른 기법 등을 선택함으로써 소안(草庵)다운 분위기도 동시에 연출하고 있다.29) 이 같은 면에서 보면 밋탄은 쇼인(書院)과 소안(草庵)이 결합된 서원풍 차실(書院風茶室)의 형태임을 알 수 있으며 쇼인즈꾸리에 센노리큐가 완성한 소안(草庵)을 도입하고자 했던 고보리 엔슈의 차시쯔 쇼인화(茶室の書院化)로도 볼 수 있다.30)
고린안(高林庵)은 카타기리 세끼슈(片桐石州)가 부친의 유패를 모시기 위해 1663년에 축조한 나라(奈良)의 지코인(慈光院)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대표적인 차실로 규모는 2조다이메(二畳台目) 형식이다. 테마에다다미(点前畳) 뒷부분에 도꼬노마(床の間)가 위치하는 이른바 테이슈도꼬(亭主床) 형식을 취하고 있다.
2조 다이메(二畳台目)의 옆으로 같은 2조(畳) 크기의 대기 공간(控えの間)을 설치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4조 다이메(四畳台目) 형식으로 사용이 가능하며 차를 대접하기 전에 손님에게 제공하는 간단한 요리인 카이세끼(懐石)를 준비하는 공간으로도 사용이 가능한 융통성 있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전체적으로는 2조(二畳)의 손님자리(客座)와 다이메 다다미(台目畳)의 주인 자리로 구성되고 있으며 그 사이에 나까바시라(中柱)를 세우고 로(炉)는 무꼬기리(向切)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테이슈도꼬(亭主床) 형식을 취함에 따라 손님 자리 쪽에는 도꼬(床)가 없기 때문에 벽의 폭 한 면에 렌지마도(連子窓)가 길게 설치되고 있다. 이는 소안(草庵)차실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방법으로, 이로 인해 손님 자리가 넓고 개방적인 공간으로 형성된다.
카타기리 세끼슈는 오리베 등이 즐겨 사용하던 상하 크기가 다른 히바리다나(雲雀棚)보다는 상하 크기가 동일한 센노리큐의 다나(棚)를 사용하고 있으며 천정도 모두 히라텐조(平天井)로 처리하여 변화무쌍한 내부공간보다는 담담하고 차분한 공간을 연출하고 있는데, 이는 인공적인 와비는 와비가 아니며 자연적으로 생긴(天作) 와비야말로 진정한 와비(人作の侘は侘にあらず, 天作の侘こそ真の侘)라는 그의 철학이 표현된 차실로 볼 수 있다. 카타기리 세끼슈가 센노리큐의 아들인 센 도안(千道安)의 다도를 반영하면서 와비 차를 기조로 하는 독특한 차풍(茶風)을 구축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종국적으로는 센노리큐의 철학과도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31) 현존하는 차실 건축 가운데 시대나 작가 및 형상 등이 증명 가능한 최고(最古)의 차실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중요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이상에서 다이묘차(大名茶)의 주요 인물과 대표적인 차실을 살펴보았으며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Table 1.]과 같다.
4.2. 다이묘차 차실의 평면구성(間取り)에 따른 비교분석
다다미는 주인(亭主)이 차를 준비하는 테마에자(点前座)와 손님이 앉는 갸쿠자(客座)로 구성되며 테마에자에 깔린 다다미를 테마에 다다미(点前畳), 손님자리에 까린 다다미를 갸꾸다다미(客畳)로 구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테마에자(点前座)는 온전한 다다미 1장이나 그것의 3/4인 다이메 다다미(台目畳) 등 두 가지 크기로 한정되어 있으나 갸꾸자(客座)는 다다미의 개수나 크기에 대한 제한은 없다.
각 사례별로 규모를 살펴보면, 엔난(燕庵)은 전체 3조다이메(三畳台目)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갸쿠자(客座)가 3조이고 테마에자(点前座)가 다이메로 구성되고 있다. 죠안(如庵)의 경우, 갸쿠자(客座)가 2조 반이고 테마에자(点前座)가 다이메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는 2조 반 다이메 형식을 보이고 있다. 밋탄(密庵)은 4조 반 규모의 갸쿠자(客座)와 다이메의 테마에자(点前座) 등 총 4조반 다이메 형식으로 다른 차실 건축보다 큰 규모를 보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코린안(高林庵)의 경우, 갸쿠자(客座)가 2조로 작아지고 있으며 테마에자(点前座)는 역시 다이메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는 2조 다이메 형식을 보이고 있다. [Table 3.]
이 가운데 밋탄(密庵)을 제외하면 센노리큐의 타이안에서 제시된 차실 규모인 2조(畳)보다는 규모가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체 4조반 이하의 코마(小間) 형식의 차실 규모를 보이고 있다. 특히 다이묘차 가운데 가장 후기에 나타난 코린안(高林庵)의 경우 테마에자의 다이메를 제외하면 다시금 2조 크기의 차실 규모로 환원되면서 센노리큐의 소안 차시쯔(草庵茶室)로의 회귀 의지가 엿보이고 있다. 이 같은 면은 실제로는 후스마를 열면 측면에 있는 2조 크기의 하카에노마(控えの間)와 함께 4조 크기의 차실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시 무사계층에 선호되던 쇼인(書院) 풍의 차실을 만들면서도 가능한 한 2조 크기의 차실을 유지하고자 한 의도가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전술한 바대로 키타기리 세끼슈(片桐石州)가 센노리큐의 아들인 센 도안(千道安)등으로부터의 영향에 따라 와비 차의 정신을 계승 및 재현하고자 하였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밋탄(密庵)의 경우, 서원의 일부분이면서 그 내부에도 쇼인도꼬(書院床)나 치가이다나(違い棚) 등 당시 쇼인즈꾸리의 전형적인 요소 등을 도입하고 있었다는 사실32)을 고려할 경우, 다이묘 차의 차실 건축은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센노리큐의 소안(草庵)으로부터 쇼인즈꾸리라는 당시의 흐름 내로 흡수되는 일련의 흐름을 추적 가능하게 한다.
또 하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다이메(台目)형식의 채용이다. 다이메는 다도기를 수납하기 위한 다이스(台子) 등을 설치하기 위하여 보통 다다미의 1/4을 잘라낸 것으로, 본 연구에서 다루고 있는 다이묘 차의 차실의 테마에자(点前座)에는 예외 없이 다이메 형식이 채택되고 있다.33) 원래 차실의 테마에 다다미는 1조(畳)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격식을 중요시할 경우 다이스(台子) 등을 필수적 요소로 하였으나 다이메 다다미의 경우 다이스를 설치할 공간이 없어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격식을 부정하고 와비 차의 정신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타이안 등에서는 그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원래 다이메의 개념이 다케노 조오(武野紹鷗)나 센노리큐 시대에 창시된 것34)으로 알려진 것도 바로 이 같은 면을 반증하고 있다. 따라서 다이묘 차의 차실에서 다이메 형식이 준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와비 차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주인이 사용하는 테마에자(点前座)와 손님이 사용하는 갸쿠자(客座)에 어떤 식으로 로(炉)를 설치하는가에 따라서도 차실의 기본적인 평면이 결정된다. 일반적으로 로를 설치하는 형식은 테마에 다다미 내에 로를 설치하는 이리로(入炉)와 테마에 다다미에 인접하는 다다미에 로를 설치하는 데로(出炉)로 구분된다. 이는 또 다시 로(炉)가 어느 방향으로 설치되는지 혹은 테마에자의 크기가 다다미 1조인지 다이메인지 등에 따라 그 형식이 세분되는데, 그 자세한 내용35)은 [Table 2.]와 같이 정리가 가능하다.
로(炉)의 위치 및 설치 방법에 따른 다이묘 차의 차실 구성을 살펴보면 죠안(如庵)만이 이리로(入炉)형식 가운데 손님 좌석 측에 로가 설치되는 무꼬로(向炉 혹은向切)을 보이고 있을 뿐이며 나머지 경우는 데로(出炉) 가운데 다이메기리(台目切) 형식을 취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엔난의 경우 다이메기리 가운데 테마에 다다미 중앙으로부터 위쪽에 로를 설치하는 형식인 아게기리(上切)가 적용되고 있으며 밋탄과 코린안은 모두 다다미 중앙으로부터 아래쪽에 로를 설치하는 사게기리(下切) 형식을 보이고 있다. [Table 3.]
특히 밋탄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례 모두가 4조반 이하의 코마(小間) 형식의 차실 구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통상 히로마(広間)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요조한기리(四畳半切) 형식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 것도 특징이다. 대신 다이메기리(台目切), 무꼬로(向炉), 스미로(隅炉) 등 일반적으로 코마(小間) 차실에 사용되는 로(炉)의 설치 형식이 적용되고 있는데, 이는 다이묘 차의 차실 내에 4.5조(畳) 이하의 소안(草庵)풍 코마(小間)형식을 추구하였던 센노리큐의 영향력이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타이안에 적용된 무꼬로 형식이 죠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실 등에서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또한 로의 설치 방법은 손님 다다미와의 관계에서 볼 때 테마에자(点前座)에 앉아 있는 주인의 우측에 손님이 자리를 잡는 혼캇테(本勝手)와 주인의 좌측에 손님이 자리하는 형식인 갸꾸캇테(逆勝手)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엔난과 조안이 혼캇테(本勝手), 밋탄과 코린안이 갸꾸캇테(逆勝手) 형식을 보이고 있다.36) [Table 3.] 이는 타이안의 경우 등에서 보이듯이 일반적으로는 혼캇테(本勝手) 형식이 주로 사용되기는 하나, 차실의 평면 구성이나 주인의 진출입 동선 등에 따라 차실 평면 구성이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차실의 평면 구성은 도꼬(床)의 위치에 의해서도 결정되는데 도꼬와 테마에자(点前座)의 위치관계에 따라 테마에자 전방에 도꼬가 위치하는 죠자도꼬(上座床)와 테마에자 후방에 도꼬가 위치하는 게자도꼬(下座床) 등이 있으며 테마에자의 상좌에 도꼬를 병렬시켜 배치한 후로사끼도꼬(風炉先床)나 테마에자의 안쪽이나 갸꾸자(客座)의 반대쪽에 도꼬를 설치한 테이슈도꼬(亭主床) 등의 특수한 형태도 있다.
사례의 경우, 밋탄(密庵)은 죠자도꼬(上座床) 형식이고 엔난(燕庵)이나 죠안(如庵)은 테마에자 후방에 도꼬가 위치하는 게자도꼬(下座床)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코린안(高林庵)의 경우는 특이하게 테마에자 안쪽 구석에 도꼬가 위치하는 이른바 테이슈도꼬(亭主床) 형식을 위하고 있다. [Table 3.] 이는 센노리큐의 타이안의 경우 죠자도꼬(上座床)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도꼬의 위치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라기보다는 차실의 공간구성이나 주인 및 손님의 동선 등에 따라서 유동적으로 그 위치가 변경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코린안에 적용된 테이슈도꼬 형식은 일반적으로 주빈(正客) 자리 근처에 도꼬가 위치하는 죠자도꼬(上座床)나 말석(末席)에 앉는 손님 근처에 도꼬가 위치하는 게자도꼬(下座床)와는 달리, 차를 대접하는 주인이 앉는 자리인 테마에자(点前座) 근처에 도꼬가 위치하는 형식을 말하는 것으로 그 이전까지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도꼬(床)는 갸꾸자(客座) 쪽에 위치하여 전면을 주빈(正客)의 자리로 설정하는 통념을 벗어난 것으로 도꼬의 위치가 반드시 신분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즉 도꼬의 위치는 신분에 따른 공간의 위계를 결정하는 요소라기보다는 작은 규모의 코마(小間) 차실을 구성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코마 차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주변의 다른 건물이나 미즈야(水屋) 및 정원 등과의 위치 관계, 대기 공간(控えの間)이나 쇼반세끼(相伴席)와의 연결 관계, 태양광의 유입 방향 등을 검토한 후 차실의 넓이나 다다미 설치 방법, 로(炉)나 도꼬노마(床の間)의 위치 및 니지리구찌(躙口)나 기닌구찌(貴人口)의 진 출입구는 물론 차도구찌(茶道口)나 규지구찌(給仕口) 등을 고려해 서비스 동선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4조반 이상의 히로마(広間)일 경우 나름대로 각 소요 공간의 결합에는 큰 문제가 없으나 규모가 작아지면 공간 구성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작은 규모의 차실은 일정한 공간구성 패턴이 존재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드는 다인(茶人)의 공간적 및 디자인적 감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양한 차실 평면이 나오게 된다.37)
다이메가마에(台目構)는 로(炉)의 한 쪽 구석에 나까바시라(中柱)와 그것과 외벽을 연결하는 소데가베(袖壁)를 세우고 그 구석에 쯔리다나(釣棚)를 설치하는 방법으로 소안(草庵)차실로부터 다이묘차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방법으로 인해 주인이 차를 준비하는 테마에자가 손님 좌석으로부터 어느 정도 이격되는 내부 공간구성을 보이게 된다.
사례의 모든 경우는 테마에자와 로(炉) 부근에 나까바시라와 이를 외벽과 연결한 소데가베를 채용하고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이 차실들이 테마에자에 다이메(台目)를 사용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초기 센노리큐 등이 소데가베를 사용했을 때는 밑 부분까지 막혀 있었으나 다이묘 차실에서는 하부의 일정 부분을 개방하여 공간감을 부여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주인과 손님과의 공간적 긴장 완화는 물론 내부공간의 개방감이 향상되게 된다. 소데가베는 직선이나 죠안(如庵)에서처럼 아치 등의 다양한 형태로 차 장인들의 감각을 통해 창의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내부공간에서의 중요한 시각적 포인트로 기능하고 있다.
개념적으로 다이메가마에는 쇼인노차의 상징인 다이스노차(台子の茶)를 소안(草庵)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거의 4조 반 이하의 규모를 보이고 있는 다이묘 차의 차실은 자연스럽게 다이메가마에를 채용하면서 와비 차의 개념을 이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차실의 출입구는 주인이 차를 내릴 때 사용하는 사도구찌(茶道口), 카이세키 등 차를 내리는 행위 이외의 용무로 손님이 앉는 갸꾸자(客座)로 진출입하는 규지구찌(給仕口) 등의 출입구와 신분이 높은 손님을 위한 기진구찌(貴人口) 및 니지리구찌(躙口) 등 손님이 출입하는 출입구로 구성된다. 기진구찌는 2매의 여닫이문으로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니지리구찌는 신분에 관계없이 몸을 부리고 들어가는 문으로서 주로 규모가 작은 고마(小間)에 설치된다.
다이묘차(大名茶) 차실은 타이안(待庵)처럼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대규모의 쇼인(書院)에 부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소안(草庵) 차시쯔와는 달리 신분이 높은 사람이 출입하는 기닌구찌(貴人口)의 존재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38) 밋탄(密庵)이 경우가 이에 속한다. 그러나 다른 차실들은 쇼인(書院)과의 관계 속에서도 고린안(高林庵)처럼 독자적으로 니지리구찌(躙口)를 통한 진출입을 유도하고 있다. 니지리구찌의 경우 차실의 구석 부분에 설치되면서 타이안(待庵)에서처럼 정면에 도꼬(床)가 보이도록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니지리구찌가 설치된 다이묘 차실의 경우 모두 건물 한쪽 구석에 설치되고 있기는 하지만39) 반드시 그 정면에 도꼬(床)가 설치되지 않고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앞에서 기술한 도꼬(床)의 위치에 따른 분류와도 그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이 또한 작은 규모의 차실 평면을 구성하는 데 따른 한계이자 해결 방법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차실이 4조반 이하의 코마(小間)이기 때문에 이것에 적합한 출입구 계획을 채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센노리큐의 와비 차의 전통을 계승하는 측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평면 구성의 내용 및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 [Table 3.] 및 [Fig. 3.]과 같다.
5. 결론
이상에서 다이묘 차(大名茶)의 특징과 대표적 작품을 평면 구성의 중심으로 살펴보았으며 그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 가능하다.
우선 다이묘 차의 차실 구성은 대부분의 사례가 4조반 다이메(四畳半台目)형식의 밋탄(密庵)을 제외하고는 각각 3조 다이메, 2조반 다이메 및 2조 다이메로 구성되고 있다. 반면에 가장 일반적인 요조한기리(四畳半切) 형식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 이는 사례들이 모두 4.5조 이하의 차실 형식인 코마(小間)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 같은 형식이 센노리큐 등에 의해 소안(草庵) 풍 차실처럼 소규모의 차실건축에 주로 사용되고 있던 사실을 생각하면 다이묘 차의 대부분의 차실이 여전히 센노리큐나 소안 차실 및 와비차 등의 영향을 유지 및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4] 이 같은 사실은 새로운 유교질서와 계급 등을 차실 건축에 적용하기 시작하던 에도시대 초기의 사회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존의 코마 형식의 차실이 차실 건축의 전형으로서 위치 설정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반면에 쇼인(書院)건축의 일부를 이루면서 4조반 다이메로 구성되는 밋탄(密庵)은 기존의 소안 풍 차실과 히로마(広間) 차실 간의 경계에 위치하는 규모를 보이고 있으며 기닌구찌(貴人口) 등 기존의 소안 풍 차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요소를 적용하거나 쯔게쇼인(付書院)이나 찌가이다나(違棚) 등 쇼인즈꾸리(書院造)의 실내 구성 기법을 차실 내에 도입하는 등 당시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다이메(台目) 형식의 채용이다. 사례를 통해 본 다이묘 차 차실의 테마에자(点前座)에는 예외 없이 다이메 형식이 채택되고 있다. 다이메는 보통 다다미의 1/4을 잘라낸 것으로, 다도기를 수납하기 위한 다이스(台子) 등의 설치가 간소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같은 형식 자체가 기존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쇼인노차(書院の茶 )나 다이스노차(台子の茶)와는 상반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기존 권력이나 계급에 대항하여 발생하였던 와비 차나 소안 풍의 차실에 대한 영향관계를 추론 가능하게 한다. 또한 다이메 형식의 차실 구성은 자연스럽게 차실 내부의 다이메가마에(台目構)로 연계되는데, 나까바시라(中柱)나 소데가베(袖壁) 및 수납을 위한 쯔리다나(釣棚) 등 다이메가마에의 구성요소가 모든 사례에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다이묘 차 장인의 철학이나 미의식에 의해 소데가베 부분에 대한 장식이나 아치 형태 등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디자인이 가미되는 경향이 강해지는 등 당시의 다이묘 차 차실 건축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자리하게 된다.
이 밖에 차실 내부의 도꼬(床)의 위치나 로(炉)의 위치 관계에 따른 유형 등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내부공간의 구성방법이 한정적인 코마(小間) 차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주변 공간과의 관계나 진출입동선 및 방위 등의 물리적 요인과 차실 장인의 공간적ㆍ철학적 디자인 감각에 따라 차실의 내부 공간 구성이 달라지는 것에 따른 결과로 볼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에도시대 초기 다이묘 차(大名茶)에 대한 정의와 특징부터 시작하여 각 다이묘들의 차에 대한 미의식이나 철학이 반영된 차실의 공간구성 특징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를 통해 다이묘차가 센노리큐로부터 시작되는 소안(草庵)차실 건축의 흐름을 계승하면서도 에도시대라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반영하는 경향을 나타내면서 후일 쇼인(書院) 건축과의 결합되는 일련의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이를 위해 본 논문에서는 주로 평면 구성에 필요한 요소나 공간구성 방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으나, 다이묘 차의 종합적인 실체 파악을 위해서는 건물구성이나 창호계획 등 다양한 부분에 대한 분석이 뒤따라야 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것은 추후 연구를 통하여 밝힐 예정이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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