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ngsu Research of Location and Space Layout of Myeongjae Yunjung Traditional House
Pungsu is can be seen as an ecological architectural science regarding native natural environment of east asia. Even though the language used in Pungsu is different from that of ecological architecture, Pungsu considered the surrounding environment of the traditional house by various Pungsu method for making and keeping more healthy life and sustainable environment. The research is for finding out how the surrounding natural environment was considered with Pungsu, a traditional ecological architectural science in case of site selection and planning house by the confucian scholar in Joseon period. Myungjae Yunjung traditional house of Nonsan in the middle of korea is selected. He is one of the greatest confucian scholar in Joseon period. The study is processed as follows. Feature of mountain expressed as dragon and four important hills of the house are analyzed in chapter 2, Water environment is studied and the geomantic landscape are analyzed by shape theory called Hyung-guk-Lon in chapter 3, 4. Finally Pungsu applied in architectural space is analyzed in chapter 5.
Keywords:
Traditional Ecological Architecture, Pungsu(Fengshui), Traditional House, Location and Space Layout, 전통생태건축, 풍수, 전통가옥, 입지와 공간배치1.서론
풍수는 동아시아 고유의 자연환경을 고려한 생태적 건축계획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풍수에서 사용되는 용어는 오늘날의 생태건축에서 사용되는 용어와 다르지만 건축물이 입지한 주변 환경을 다양한 방식으로 고려한 건축계획을 통해 보다 건강한 삶과 생명을 유지하고1) 후손의 번성을 통해 가문을 잇고 종족보존을 위한 일종의 전통적 생태건축학이라고 할 수 있다.
풍수에서는 산, 수, 방위, 사람이 혼연일체로 보고 그것들이 이루는 자연 질서가 조화와 균형을 갖추었는가에 따라 길흉을 판단한다. 풍수는 인간의 건축행위가 자연에서 수용되는 대상이며 건축은 더 큰 조직력을 갖는 자연의 구조에 순응하여야 한다는 논리이다.2)
본 연구는 반가(班家)로서 조선시대 대학자로 명망 높은 명재 윤증선생고택을 대상으로 풍수고찰을 함으로써 당시의 지배계층이자 학자인 유학자들이 가옥을 조성함에 있어 당시의 전통적 생태건축학인 풍수를 통해 주변 자연환경을 어떻게 고려하여 건축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명재(明齋) 고택(古宅)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위치하고 있다. 논산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연산군 · 노성군 · 석성군 · 은진군을 통합하여 붙인 지명으로, 이전에 불리던 지명 ‘놀뫼’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놀뫼’는 이 지역을 예부터 ‘느러리재, 누르기재, 느르뫼’라 부르던 것에서 연유한다.3) 한편, 2006년 논산 향토사학자 유제협이 논산의 옛 이름은 ‘논뫼(沓山)’라는 설을 제기하여 주목된다. 그는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1656)에 나오는 ‘답산교(沓山橋)’와 논산 토박이들이 말하는 ‘논뫼다리’, 논산 부창동의 작은 산 이름 ‘논뫼’ 등으로 미루어 논산은 ‘논뫼’에서 유래한 것4)이라고 주장한다.
노성면(魯城面)은 논산시 북부에 위치하며, 백제 때에 열야산현(熱也山縣), 통일신라 때에 니산현(尼山懸)이라 불렀고, 조선시대에는 이산현 · 이성현(尼城縣) 등으로 부르다가 정조 때 노성현(魯城懸)이 되었다. 노성현으로 바뀐 것은 숙종 때 송시열(宋時烈)의 뜻을 따라 그 제자들이 이곳에 공자孔子의 영정을 모시는 궐리사(闕里祠)를 창건한 것과 관련되는데, 이곳이 공자의 어머니가 치성을 드리고 공자를 낳았다는 중국 산둥성(山東省) 이구산(尼丘山)과 비슷하다 하여 노성으로 고쳤다 한다. 교촌리(校村里)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이 마을에 노성향교(魯城鄕校) 있어 향교말 또는 교촌리라 부르게 되었다5)고 한다. 이처럼 이곳은 궐리사와 향교 등이 자리하여 유교 사상의 뿌리가 깊은 충청도의 큰 고을이었으며, 조선시대에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된 선비의 고장이다.
명재 고택이란 택호宅號의 주인공 윤증(尹拯, 1629~1714)은 논산에서 태어나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학문을 닦고 연구하면서 조선의 정신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던 대학자이다. 그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명재 또는 유봉(酉峰) 아래 살았으므로 유봉이라고도 하였다.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公州) 이씨(李氏)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그의 아버지 윤선거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연고로 한 성리학의 유파인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이론적 근거를 다진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외손이었고, 기호학파의 적통을 계승한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 가운데 송시열 등과 함께 ‘충청5현(忠淸五賢)’으로 거론되는 학자였다. 윤증은 14세 때 아버지가 금산(錦山)에서 사람이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할 도덕적 의리 즉 도의(道義)를 강론하였는데, 그때 공부하면서 성리학에 전심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에게서 배웠으며, 19세에 기호학파의 거두 권시(權諰)의 딸과 혼인하고, 권시의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송시열에게서 배웠다.6) 그는 1676년 가옥이 있는 이산현 유봉으로 이사 간 뒤에는 주로 후진들의 교육에 전심을 기울였다. 그는 학업과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이름이 높아 조정에 천거되었고, 효종 말년부터 숙종 때까지 우의정 · 판돈령부사 등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학문적 영향력은 매우 컸다.7)
2.용과 사신사로 표현되는 주변 산세(山勢)의 분석
이 고택은 양반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솟을대문과 담장이 없어 시원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원래는 정려각8)을 지나면 연못 밖 진입로 부분에 담장과 솟을대문이 있었다고 한다.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老論)과 윤증을 지지하는 소론(小論)이 강하게 대립하던 18세기 초에 노론의 주도로 노성향교가 원래 있던 노성초등학교 자리에서 현재와 같이 명재 고택 옆으로 이전하였고, 1850년 노론의 눈초리를 느끼고 담장과 대문을 헐게 되었다 9)고 한다.
고택 주변에 있는 산들을 살펴보면 고택의 주산(主山)은 노성산(魯城山)이다. 주산은 ‘택주지산(宅主之山)’의 의미로, 집의 주인이 되는 산이라는 뜻이다. 즉 집은 어떤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자연이 주인이라는 우리 조상들의 자연 중심의 풍수인식이 들어 있는 말이다. 노성산은 조선시대 노성현(지금의 노성면)의 진산(鎭山)이기도 하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니산편(尼山篇)에 “관아 북쪽 5리 거리에 노산(魯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현의 진산으로 일명 성산(城山)이라고도 한다.”10)라고 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노성산에서 나온 맥은 계속 진행하여 집 뒤에 이르러 기세를 모으려는 듯 단아한 봉우리 옥녀봉(玉女峰)을 일으킨다. 옥녀봉에서 세 맥이 나오는데, 그 중 가운데의 중심 맥이 집 뒤로 들어온다. 집은 그 맥의 기운을 받으면서 남쪽을 향하고 있다. 집 앞에서 산을 바라보면 집 뒤로 둥근 반원형의 산들이 중첩되어 보인다. 이런 형태를 한 맥을 ‘월사맥(月沙脈)11)’이라 한다. 월사맥을 형성하며 내려오는 용맥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고 상하 ⋅ 좌우로 변화 하면서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생명력이 넘치는 것을 기운이 왕성한 맥이라는 의미에서 ‘생왕맥(生旺脈)’이라 한다.
고택에서 바라보면 왼쪽에 있는 산인 좌청룡(左靑龍)은 길게 내려오면서 집을 한 번 감싼다. 그러나 좌청룡은 오른쪽에 있는 산인 우백호 보다 높이가 낮다. 이런 연유로 우측 산 능선의 낮은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비보(裨補) 목적으로 보이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세 그루 서 있다. 이 느티나무들은 수령이 무려 400년으로 추정되어, 2005년 논산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이 보호수는 좌우 산의 균형을 맞추는 의미도 있으며,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겨울 찬바람을 막아 열손실을 줄여주는 현실적인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오른쪽의 우백호 끝자락에는 노성향교가 있다.
3.고택 주변 수환경(水環境) 분석
명재 고택은 하천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인근 계룡산(鷄龍山)에서 발원해서 마을의 동쪽을 지나가는 노성천(魯城川)이 직선거리로 1㎞가 넘고, 마을 앞으로 가로지르는 시내도 800m이상 떨어져 있다. 이렇게 비교적 큰 물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에는 집 근처의 작은 물을 살펴봐야 한다. 크기는 하천에 비할 바 아니지만, 산에서 내려오는 자연수로 이루어진 도랑은 비록 크기는 작아 아직 왕성하지 않더라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옥녀봉에서 내려온 용맥(龍脈, 산줄기)은 사람이나 생명체를 생생하게 해주는 생기(生氣)라고 표현하는 자연의 좋은 기운을 갖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 생기는 산줄기 좌우의 상대적으로 낮은 골을 따라 내려온 물의 보호를 받으면서 고택으로 접근한다. 그 후 물줄기는 집 뒤에서 분기(分岐)하고 집을 휘감아 돌면서 집 앞에서 모이고 있다.
집 앞에서 모이는 물은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집 가까이로는 평소에는 땅 속으로 흐르다가 ‘용출(湧出)한다.’는 말처럼 샘솟아 우물을 만들고 있는 물이 있다(위의 그림에서 파란색 표시). 이 물은 ‘명당수(明堂水)’ 또는 ‘진응수(眞應水)’라고 하는데, 물로 상징되는 용의 기세가 왕성하여 땅 위로 솟구친 것으로 매우 길한 것으로 본다.12) 비나 눈이 오면 지표면으로 흐르는 물이 지하로 흐르는 물 밖으로 다시 한 번 감싸면서 우물 바로 아래쪽에 모였다가 더 내려간 후 연못으로 고인다(위의 그림에서 빨간색 표시 물길). 이렇게 두 겹으로 감싸니, 용맥을 따라 산에서 내려온다고 여겨지는 좋은 기운(生氣)은 더 이상 흘러가지 못하고, 안채 대청 위치에 ‘혈(穴)’이라고 하는 생기의 결집처를 형성하고, 혈 앞에 위치한 마당에는 풍수의 명당(明堂)이 이루어진다.
이 집 앞 서쪽으로 상당히 큰 못이 있다. 풍수에서는 명당 앞에 고여 있는 이러한 물웅덩이를 일러 ‘지당수(池塘水)13)’라고 한다. 이곳의 지당수는 샘에서 나온 물과 비가 내린 후 흘러내린 물을 모아 조성한 것이다. 그런데 이 못은 비교적 소박한 집의 규모에 맞지 않게 상대적으로 크다. 충청도의 웬만한 반가에서 못이 있는 경우는 종종 볼 수 있지만, 이 집 못만큼 큰 것은 흔치 않다.
못 안에는 천원지방(天元地方) 사상에 맞게 여느 못처럼 장방형 못에 원형 섬을 조성한 방지원도(方池圓島)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섬의 위치가 상당히 이채롭다. 섬은 보통 못 가운데에 조성되는 것인데, 이곳은 한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다. 사랑채 누마루에서 내려다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14)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왼쪽 좌청룡이 사랑마당을 감싸고 있는데 반해, 오른쪽은 내백호(內白虎)가 짧고 외백호(外白虎)에 해당되는 있는 산이 멀리서 나지막하게 있어 감싸여지지 않고 열려있어 허(虛)하다. 풍수에서는 좌우의 산이 집의 전면에서 모아져서 감싸는 것을 바람직한 상태로 본다.15) 그런데 이렇게 열린 상태는 부족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를 비보하기 위해 연못을 가로방향으로 길게 조성하고, 누마루에서 보이는 못의 한쪽 모서리에 섬을 조성하고 배롱나무를 심은 것으로 사료된다.
4.형국론(形局論)에 따른 분석
풍수에서는 집 뒤에 위치한 작고 단아한 봉우리를 ‘현무봉(玄武峰)’이라고 한다. 현무란 북쪽 방위에 있는 신(神)을 말하며, 거북과 뱀이 뭉쳐진 그림으로 상징된다. 중국 ‘초사(楚辭)’ 원유(遠遊)의 보주(補注)에 “현무는 거북과 뱀이 모인 것을 이른다. 북방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현(玄)이라고 이르고, 몸에 비늘과 두꺼운 껍질이 있으므로 무(武)라고 한다.”16)고 하여 현무의 모양과 그 이름을 붙인 까닭을 말하고 있다. 고택 가까이에 있는 현무봉의 형태는 둥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산천 등 자연도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보았다.17) 이는 풍수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자연이 갖고 있는 힘을 표현하기 위해 산천의 모양새를 보고 동물이나 식물 등 생명체의 형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 특히 발달하였다. 이는 일반인들이 산의 형태적 특징과 성격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풍수에서는 정기 가득한 좋은 땅을 사람, 동물, 물질, 식물, 문자 따위에 비겨서 설명하는 데 이를 형국이라 한다.18) 이를 보다 체계화한 이론을 ‘형국론(形局論)’ 또는 ‘물형론(物形論)’이라 한다. 형국론은 우주만물 만상이 有理有氣하며 有形有象하기 때문에 외형 물체에는 그 형상에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해 있다는 보는 관념을 원리로 하고 있다.19) 풍수의 형국론에서 둥그런 형상은 아름다운 여성의 머리 모습을 닮았다고 보고, 그 모양이 아주 잘 생긴 형태를 갖춘 산은 옥과 같이 귀한 여자의 기운을 갖는 봉우리라 하여 ‘옥녀봉(玉女峰)’이라고 불렀다.
1872년에 작성된 전국 군현지도의 노성현 부분을 보면, 당시 선조들의 풍수인식이 잘 표현되어 있다. 지도를 보면 봉우리를 아리따운 아가씨의 둥그스름한 머리 형태처럼 그리고, 옥녀봉(玉女峰)과 이구산(尼丘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구산이란 이름은 앞서 지역 유래에서 보았듯이, 공자의 영당(影堂)인 궐리사 뒷산 모습이 공자의 어머니가 치성을 드리고 공자를 낳았다는 중국 산둥성 이구산과 비슷하여 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도를 보면 이구산의 동쪽 머리카락 한 가닥처럼 보이는 산줄기가 흘러내려와 노성향교에 이르고 있다. 노성향교는 명재 고택(붉은 점선표기)의 서쪽에 있는 우백호(右白虎) 끝자락에 위치한다.20)
형국론에 따르면 옥녀봉 중 앞산이 가로 형태의 낮은 산으로 거문고처럼 있는 경우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상이라 하여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라 칭한다. 고택 앞에는 거문고에 해당되는 낮은 앞산이 가로로 놓여 있어, 옥녀탄금형으로 볼 수 있다. 선조들은 옥녀탄금형에서는 옥녀라는 말처럼 용모가 준수하고 귀한 자손이 배출된다고 길한 것으로 여겼다.
5.건축공간의 풍수적 분석
고택은 ㄷ자형 안채와 그 앞에 대문채, 대문채와 연결된 사랑채가 있고, 동쪽에는 사당(祠堂)이 그리고 안채 왼쪽 날개 부분의 서쪽에는 곳간채가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의 규모는 다른 반가와 달리 매우 소박한 규모이다.
대문채는 내⋅외벽이 있다. 이는 대문을 들어오는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안채의 사생활을 지켜주면서, 벽 아래 틈으로 보이는 신발을 통해 출입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하는 역할도 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풍수적인 역할도 담겨 있다. 풍수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곳을 ‘수구(水口)’라고 한다. 물이나 기체는 흘러 다니는 유체(流體)이다. 기(氣)도 유체와 같은 성질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흘러 다니는 것을 조절하는 방법은 막거나 틈을 줄여서 조절할 수 있다. 또한 방향 전환을 통해서 체류시간을 길게 하여 오래 머물도록 할 수도 있다. 대문의 내·외벽은 수구에서 기(氣)가 흐르는 유속을 조절하여 서서히 빠져나가도록 하는 기능을 하는데, 이런 기의 풍수적 조절장치를 ‘수구막이’라고 한다. 이 내·외벽은 고택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조절하는 수구막이로 볼 수 있다.
대문에는 하인방(下引枋)이 있다. 자세히 보면 이 하인방이 올라와 지표면에서 떠 있다. 오늘날 현대건축에서 편리하고 기능적인 것을 추구하는 시각에서 보면, 인방은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한 것인데, 게다가 위로 올라와 있어 통행 시 매우 주의가 필요하다. 때문에 집안사람도 손님도 대문을 출입하기 위해서는 잠깐 멈춰선 후 조심해서 건너야 한다. 선인들은 기(氣)도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생각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여기서 이동속도를 줄인다고 하는 것은 좀 더 마당에 기를 오래 붙잡아둘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대문 앞에는 기를 조절하기 위한 또 다른 장치들이 있다. 첫 번째 장치로 층계의 폭을 점진적으로 줄였다. 폭이 줄어들면 병목현상처럼 한 번에 빠져나가지 못하고 이동속도가 늦춰진다. 두 번째 장치로 사선 斜線의 적용이다. 좁아진 끝 계단 밑에서는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어 직선일 때보다 서서히 빠져나가도록 의도하고 있다. 또한 바닥에 깐 얇은 돌(박석, 薄石)도 불규칙한 형태여서 기의 흐름이 늦추어 진다.
문화재청의 ‘윤증선생고택(2007)’의 옛 사진을 보면 계단 아래 좌우로 돌로 만든 석조물인 물확(水碓)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는데, 여기에도 풍수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풍수에서 수구 양쪽에 바위가 마주보고 있는 것은 ‘한문(扞門)’이라 하는데, 글자 그대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문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 예전에 계단 양 옆에 있던 물확은 또 하나의 기운막이 장치로 볼 수 있다.
ㄷ자형 안채는 엄격한 대칭 구조를 갖고 있다. 의례(儀禮)를 행하기 위한 10칸 대청이 가운데 있고, 혈(穴)이 위치하는 곳이다. 좌우로는 퇴(退)를 갖춘 날개채(翼舍)가 위치하고 있는데, 좌우 날개는 혈을 보호하기 위해 감싼 풍수의 용호(좌청룡, 우백호)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동쪽 날개는 안마당으로 전퇴(前退)만 있고, 서쪽 날개는 전후퇴(前後退)가 있어 가로 폭이 더 크다. 집 주변의 사격(砂格, 전후좌우의 산)에서 다소 약한 우백호를 보완해주기 위한 의도로 사료된다. 우백호 역할을 하는 서쪽 날개는 대문채와 연결되면서, 집을 감싸면서 혈 앞의 혈을 보호해주는 안산(案山) 역할을 해준다. 이를 통해 안채공간 배치는 풍수의 사신사가 완벽히 재현되면서 안마당 명당의 기운이 조금 더 머물러 있도록 해준다.
곳간채도 풍수적으로는 다시 한 켜의 우백호 기능을 수행한다. 또한 본채와 달리 약간 축이 틀어진 것은 한국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완전 평행이 아닌 자연스런 배치로 여겨진다.
사랑채는 뒤로부터 점차 낮아지는 표고 차를 감안하여 안채와 같은 레벨을 유지하기 위해 2중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사랑채를 세워 다소 높게 조성되었다. 2중 기단은 위, 아래 단 모두 모서리만 살짝 모를 접어 쌓았지만, 그 축조방식과 거기에 담긴 의도는 매우 다른 것으로 판단된다.
상부 기단은 일정한 크기로 정교하게 다듬은 돌을 2벌로 가지런히 일직선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는 엄격하고 근엄하여, 마치 유교의 예제(禮制)를 지키기 위한 예학자(禮學者)의 위엄이 느껴진다. 반면 아래 기단은 크고 작은 돌을 모서리만 살짝 다듬어 쌓았다. 하부 기단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인근 산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곡선형으로, 상부 높이가 일정하지 않아 부드러운 형태로 충청도 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여기에 어떤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즉 상부 기단은 엄격한 예학자가 예제를 지키며 살고 있는 건물이라는 것을, 즉 성리학적 세계를 겉으로 드러내고 있다. 반면 하부 기단은 주변 자연과의 조화를 꾀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인근의 산이나 구름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구름은 하늘의 신선神仙 세계와 연결된다.
상부 기단은 일정한 크기로 정교하게 다듬은 돌을 2벌로 가지런히 일직선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는 엄격하고 근엄하여, 마치 유교의 예제(禮制)를 지키기 위한 예학자(禮學者)의 위엄이 느껴진다. 반면 아래 기단은 크고 작은 돌을 모서리만 살짝 다듬어 쌓았다. 하부 기단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인근 산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곡선형으로, 상부 높이가 일정하지 않아 부드러운 형태로 충청도 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여기에 어떤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즉 상부 기단은 엄격한 예학자가 예제를 지키며 살고 있는 건물이라는 것을, 즉 성리학적 세계를 겉으로 드러내고 있다. 반면 하부 기단은 주변 자연과의 조화를 꾀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인근의 산이나 구름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구름은 하늘의 신선神仙 세계와 연결된다.
‘도화원기’의 주 내용은 한 어부가 고기를 잡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물 위로 떠내려 오는 향기로운 복숭아 꽃잎 향기에 취해 꽃잎을 따라가다 발견한 신세계를 말한다. ‘도화원기’에서는 어른 한 명이 간신히 통과할 작은 동굴을 통해 신세계에 들어가는데, 이 집 사랑채의 누마루 전퇴 쪽 문도 사람 한 명이 들어갈 크기이다. 무릉도원은 복숭아꽃이 만발한 가운데 가없이 너른 땅과 기름진 논밭, 풍요로운 마을과 뽕나무 · 대나무밭 등 그야말로 속세에서는 보기 힘든 아름다운 풍경으로 묘사되고 있다. 명재 고택 주변도 너른 땅과 논밭이 있고, 안채 뒷마당의 대나무밭과 예전에는 뽕나무밭 등이 있었다는 기록을 살펴볼 때 도원 세계를 구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 또한 ‘도원인가’의 글씨를 자세히 보면 ‘桃’ 자의 나무 목(木) 변(邊)이 위로 올라가 있다. 이는 이곳이 하늘에 있는 신선 세계임을 상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글자 색 또한 하늘의 색인 옥색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21)
누마루 앞 기단에는 30~50㎝ 정도 의 크고 작은 괴석으로 석가산(石假山)을 조성해 놓았다. 석가산의 사랑채 쪽으로는 반원형 못을 파놓았다. 원형은 천원지방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늘을 상징한다고 볼 때, 반원형으로 상징되는 하늘에 기암괴석으로 가득 찬 것이 마치 일만이천봉으로 이루어진 금강산(金剛山)처럼 보인다. 즉 신선세계인 도원인가의 사랑채 누마루 앞에 또 하나의 하늘세계인 아름다운 금강산을 조성해 놓고, 누마루에 앉아서 내려다보고자 했던 의도가 엿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현실에서는 예제를 실천하는 예학자로서의 모습이지만, 윤증 선생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그러하였듯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무릉도원의 이상세계를 그리워했던 것 같다. 그 이상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하부 기단은 구름을 형상화하여 부드러운 곡선 기단으로 조성하고, 상부 기단 맨 윗돌 갑석에는 하늘로 상징되는 원형 못에 금강산을 본떠 무릉도원의 이상향을 만들어 놓았으며, 현판에 옥색으로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의 집’이라고 명시한 것으로 사료된다.
6.결론
본 연구는 조선시대 대학자로 명망 높은 명재 윤증선생고택을 대상으로 풍수고찰을 함으로써 당시의 지배계층이자 학자인 유학자들이 가옥을 조성함에 있어 전통적 생태건축학인 풍수를 통해 주변 자연환경을 어떻게 고려하여 건축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주요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택의 주산은 노성산으로 집 뒤에 이르러 옥녀봉이란 현무봉을 배산한 후 월사맥을 형성하며 내려오고 있다. 고택은 좌청룡에 해당되는 우측 산이 높이가 낮은 것을 나무를 식재하여 비보를 통해 균형을 맞추고 있다.
둘째. 용맥 좌우에서 내려온 물줄기는 고택을 휘감아 돌고 집 앞에서 모여 용맥을 따라온 생기의 결집처를 형성하고 풍수명당을 만들고 있다. 집 서쪽에 위치한 못은 사랑채에서 볼 때 너무 열려있어 시야각을 고려하여 섬의 위치를 못의 모서리에 조성하고 나무를 식재하여 덜 개방적이도록 비보하고 있다.
셋째. 형국론으로 보면 고택은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옥녀탄금형 형국으로 귀한 자손의 배출을 염원한 것으로 사료된다.
넷째. 건축공간을 보면 대문채에는 내·외벽, 하인방, 돌층계와 사선 길 및 박석 등을 통해 안채의 기운의 유출의 조절을 꾀하고 있다. 가옥의 배치는 좌우측 건물과 대문채등이 풍수의 사신사 역할을 수행하도록 고려하여 배치하고 있다.
다섯째. 사랑채의 2중 기단에는 주변 산세를 따르면서도 예학자로서 엄격함이 동시에 고려되었다.
여섯째. 기단과 누마루의 현판 그리고 석가산을 통해 이상세계를 염원한 조선시대 유학자의 도가적 세계관도 엿보인다.
이상을 통해 성리학자 윤증선생의 고택은 집터의 선정 및 각 채의 배치 그리고 정원조성에 이르기까지 풍수를 통하여 주변 자연환경을 세심하게 고려하여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Acknowledgments
※ 이 논문은 한옥문화 (2012년 여름호)에 처음 보고한 연구에 기초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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