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덴즈쿠리(寢殿造) 배치 및 형상에 대한 발생학적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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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Shindenzukuri is one of the prototypes of Japanese residential architecture, a style of aristocratic houses of the Heian period. Its importance is emphasized in various aspects such as connection with Buddhist temples influenced by China and the imperial residence, Dairi affected by Tang Dynasty, reflection of Japanese culture that advocated breaking away from Chinese culture at the time, and relation with Shoinzukuri which is the prototype of Japanese architecture today. It reflects the social class order of the Heian period at the time, as well as the Japanese sentiment and aesthetics. It is very meaningful to explore the roots of today's Japanese residential architecture through the study of Shindenzukuri and analysis on its origins and characteristics.
In order to understand the status and importance of Shindenzukuri in architectural history, the flow of academic evaluation and related research in Japanese architectural history was examined. In order to examine the origin,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process of Shindenzukuri, the characteristics of noble houses in the Nara period were examined. The research includes the study of remains of the 10th century and before that were excavated from Hean-kyo and Genji Monogatari(1008) to show lifestyles and dwellings of that time and the influences from Chinese palace, Tang dynasty's residence, Sahapwon, Buddhist Temple, and Dairi within the Japanese imperial palace are complexly represented.
Shindenzukuri is symmetric overall referring to Chinese palace and the residence, Sahapwon. The similarities to Dairi and temples influenced by China are shown in aspects of three row arrangement with centering Jeonjeon and spatial structure of main room and Hishasi. The difference from Chinese palaces, shrines, temples, and aristocratic houses in the Nara period is open space in Shindenzukuri. Shindenzukuri shows the addition of Japanese own culture and tradition to Chinese influence.
Keywords:
Shindenzukuri, Japanese Traditional House, Building Arrangement, Embryological Analysis키워드:
신덴즈쿠리, 일본 전통 주거 건축, 건축물 배치, 발생학적 논의1. 서론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일본 건축사 상 신덴즈쿠리(寝殿造)1)는 헤이안(平安) 시대의 귀족주택에 한정적으로 나타나는 양식이라는 점과 그로 인한 보급 및 확산의 문제 등의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불교 사원건축이나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황거(皇居)인 다이리(内裏)와의 연관을 보이면서도 당시 중국문화로부터의 탈피를 주창한 국풍문화(國風文化)의 반영 및 후일 오늘날 일본 건축의 원형이 되는 쇼인즈쿠리(書院造)로의 연계성 등 다양한 측면에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덴즈쿠리 양식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현존 유적이나 유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역사적 고증이나 정확한 실체 파악은 쉬운 일이 아니며 헤이안쿄(平安京) 발굴 등에 의한 학술적 연구 이전에는 헤이안 시대의 귀족사회의 생활상을 그린 켄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1008)나 가오쿠잣코(家屋雑考, 1842) 등에 기록된 내용을 단편적으로 인용이나 참고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이 같은 이유로, 고대 건축의 경우 일본 건축사 분야에서의 주된 연구가 주로 불교 사원건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상대적으로 황거(皇居)나 귀족주택 등 주거 건축에 대한 미미한 편이었다. 그러나 교토에서의 헤이안(平安) 귀족주택에 대한 발굴 성과나 오타 세이로쿠(太田静六)등의 건축사학자에 의한 히가시산죠도노(東三条殿) 등 신덴즈쿠리 건축물 복원 등에 힘입어 그 구체적인 형상과 공간적 특징이 학술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는 그 동안의 건축사 연구가 사원이나 신사 등 종교건축 중심의 연구에서 주거분야로의 확대를 의미하며 나이가 고대 주거건축의 연구가 오늘날 일본 주거건축의 원형을 모색하는 중요한 연구의 한 분야로 자리하게 되는 의미도 포함하게 된다.
사실 신덴즈쿠리는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귀족의 주택에 한정된 건축양식으로 그 영향력이나 사회 보급 정도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신덴즈쿠리가 무로마찌(室町) 시기 이후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무사계층의 쇼인즈쿠리로 연계되는 사회적 · 공간적 질서를 자연스럽게 전수하면서 선사시대부터 이어오던 고상식(高床式) 주거의 연장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오늘날 일본 건축의 원형으로 간주할 수 있는 마루(床) 구조의 채용이나 부분적이긴 하지만 다다미 및 창호와 같은 다양한 공간요소가 내재되어 있는 등 쇼인즈쿠리는 물론 현재 일본건축의 뿌리와 그 본질적 특성이 공유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역사적 실체나 사실로서의 의미 이상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은 부정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 신덴(寢殿)과 타이(対) 등 복수 건축물이 회랑을 통해 연결되면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는 등 기존 일본 주거건축에서는 자주 나타나고 있지 않은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사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신덴즈쿠리에는 당시 불교문화의 영향은 물론 중국 등으로부터 전래된 주거양식 및 일본 고유의 건축양식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본 연구는 신덴즈쿠리의 건축사적 의미와 공간적 특징 등을 살펴보는 연구 가운데 하나로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본 연구에서는 신덴즈쿠리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인 신덴(寢殿)과 타이(対)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건축물 배치의 발생과 성립에 대한 논의를 우선적으로 집중함으로써 현존하는 유구나 사례가 없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신덴즈쿠리 배치가 중국 등의 외래 건축과 일본 고유의 건축적 특징이 결합된 형식임을 밝히고 그 특징을 논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신덴즈쿠리의 공간적 구성이나 시기별 배치의 공간 변화 및 주생활적 측면에서의 분석을 위한 후속연구의 기초적 자료로 활용하고자 한다.
1.2. 연구의 범위 및 방법
본 연구는 헤이안 시대의 귀족주거 양식인 신덴즈쿠리의 발생과 성립에 대한 연대기적 고찰과 당시 생활상 등으로부터 유도되는 신덴즈쿠리 고유의 특징 등을 문헌이나 사료 등을 통해 고찰함으로써 지금까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던 신덴즈쿠리의 역사적 위상과 함께 그 발생과 성립에 관한 발생학적 검토를 위하여 진행되었다. 주요 연구 방법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선, 신덴즈쿠리의 정의 및 이에 따른 공간구성 및 양식적 특징 등 일반적인 사항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2. 다음으로 신덴즈쿠리의 건축사적 위상 및 중요성 등을 파악하기 위하여 일본 건축사에서의 학술적 평가와 관련 연구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또한 신덴즈쿠리의 정확한 출현 시기와 발전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헤이안쿄(平安京)에서 발굴된 10세기 및 그 이전 시기의 유적이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1008) 등 당시의 생활상이나 주거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중심으로 신덴즈쿠리의 특징을 조사하였으며 에도(江戶)시대에 출간된 가오쿠잣코(家屋雑考, 1842) 등에서 기록하고 있는 신덴즈쿠리의 형상이나 내용 등을 상기의 내용과 비교 검토함으로써 신덴즈쿠리의 발생과 발전과정 및 특징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였다.
3. 신덴즈쿠리의 발생과 성립 및 영향관계 등을 살펴보기 위하여 우선, 헤이안 시대의 전 시대인 나라(奈良)시대의 귀족 주택으로부터의 영향관계를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신덴즈쿠리가 귀족주택이었으며 천황 등이 화재 등 유사시에 거처하는 임시주거로도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천황의 주거인 다이리(内裏)와의 유사성 및 상관성을 추적하였으며 그 이전에 다이리가 중국 건축의 영향을 받은 건축이라는 사실로부터 중국의 궁전건축이나 사합원(四合院)과의 영향관계를 살펴보았다. 이 밖에도 아스카(飛鳥) 시대 이후의 불교 사원건축과의 유사성 및 영향관계 등도 추가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신덴즈쿠리 형성과정에는 중국 궁전건축이나 당(唐) 시기의 사합원(四合院) 및 불교건축을 비롯하여 일본 황궁 내의 다이리 등으로 부터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종합적으로 도출하였다.
상기 연구를 위하여 주로 문헌을 중심으로 자료를 수집 및 정리하였으며 그 주요 내용별 참고 문헌이나 선행연구는 다음 2장에서 별도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본 논문의 성격상 인물이나 신덴즈쿠리 관련 전문 용어 등은 국립어학원 일본어 표기 규정을 참고하면서 가능한 한 원어 발음에 따라 표기하였다.
2. 신덴즈쿠리(寢殿造) 개요 및 관련 연구와 사료를 통한 신덴즈쿠리의 배치
2.1. 신덴즈쿠리의 정의 및 일반적 특징
신덴즈쿠리는 10세기경 헤이안(平安) 시대 교토(京都)에서 성립된 귀족주택 양식을 말한다. 오타세이로쿠(太田静六) 등 일본 건축역사학자들은 신덴즈쿠리가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궁전건축을 기초로 하면서도 이를 국풍화(國風化)3)하여 일본 특유의 저택건축으로 발전한 것으로 정의하는 경우도 있지만[5] 건축사적으로 신덴즈쿠리는 헤이안(平安) 시대인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에 걸쳐 나타난 상류 귀족 주거 양식으로 후일 무로마찌(室町) 시대 이후의 쇼인즈꾸리를 거쳐 오늘날의 와후(和風) 주택의 원류를 이루는 주거건축물 양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앞서 논한 대로, 현존하는 건축물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토다이리(里內裏)로 사용되던 저택 이외의 중 소규모의 신덴즈쿠리에 대한 역사적 자료나 정보는 거의 없기 때문에4) 신덴즈쿠리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12세기 경 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루이쥬조요쇼(類聚雑要抄)5)나 켄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1008)등의 사료를 통해 당시 최상류 계층의 저택 모습이나 실내 공간 사용방법(室礼) 등을 추론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가오쿠잣코(家屋雑考, 1842)에 수록된 신덴즈쿠리의 개략도나 교토(京都) 헤이안쿄(平安京)내의 귀족 주택 발굴 및 호리카와도노(堀河殿) 등 당시 귀족 주택에 대한 복원 등에 힘입어 신덴즈쿠리의 형상이나 공간 구성 등이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앞의 가오쿠잣코(家屋雑考)와 겐지모노가타리 등에 나타나는 신덴즈쿠리의 공통적인 형상은 주위를 토담(土塀)으로 둘러싸고 외측 담장의 내부 정원 주위에 배열된 건물에 의해 ㄷ자 형태로 둘러싸인 배치를 보이고 있으며 남측 경계 부분에는 뱃놀이나 자연 감상을 위한 연못이 설치되어 있다. 공간의 배치는 침전(寢殿)6)이라 불리는 슈덴(主殿)이 전체 건물의 중심이 되며 침전의 동서 및 북측에는 타이노야(対屋)가 자리하고 각 방은 긴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신덴(寝殿)은 남향으로 배치되고 있으며 타이(対)는 신덴의 동서방향 혹은 북측에 지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건물들은 와타도노(渡殿)와 스키와타도노(透渡殿) 등의 두 개의 긴 복도형식의 건물로 연결되고 있다[Fig. 1]. 또한 형태구조적으로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모야(母屋)와 히사시(庇)라는 건축구조에 나무 판 마루(板床)를 설치하고 방이나 내 외부공간을 툇마루(濡れ縁)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리마(梁間)가 2칸인 후쿠로우(複廊)나 1칸인 단로우(単廊)로 신덴(寢殿)과 타이(対)을 연결하는 형상을 보이고 있다[Fig. 1].7) 이 같은 모야와 히사시의 결합에 의한 구성방법은 신덴즈쿠리의 가장 큰 특징으로 볼 수 있다.8)
주요 건물에는 도마(土間)가 아닌 판 마루(板床)를 깔았으며 그 주위에는 스노코엔(簀子縁)9)이 설치되어 있다. 건물의 바깥 둘레에는 벽은 거의 없으며 출입구에는 양여닫이 쯔마도(両開きの妻戸)를 설치하고 나머지 부분에는 시토미도(蔀戸)나 야리도(遣戸)10)를 사용하여 낮에는 계속 열어두기 때문에 개방적 건물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신덴(寢殿)의 남측에는 넓은 정원과 연못이 만들어졌으며 뱃놀이 등을 위한 쯔리도노(釣殿)라는 건물이 설치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택지에 수목을 심거나 연못을 설치하는 등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 점이 주요 특징이며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이상향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11)에서 불교문화와의 연관성을 엿보이게 한다.
지붕의 형태는 일부 하급 신덴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이리모야즈쿠리(入母屋造)로 구성되었으며 하위 계층의 주택에는 박공지붕에 히사시를 추가한 형태도 나타나고 있다. 신덴즈쿠리의 최상급 지붕은 히와다부끼(檜皮葺)12)이며 격이 좀 떨어지는 경우는 판자 지붕(板葺)이나 초가지붕(茅葺)으로 마감하기도 하였다.
구조적으로는 모야와 히사시로 이루어진 대공간의 지붕을 지지하기 위해서 건물 외측의 카와바시라(側柱)와 히사시 내측의 이리카와바시라(入側柱)를 사용하였다. 건물의 좌우 흔들림을 방지하기 위해 기둥과 기둥 중간에 나게시(長押)13)를 설치하였으며 카마구라(鎌倉)시대 이후에는 누끼(貫)가 사용되었다. 또한 토마식(土間式)이 아니라 마루 바닥을 설치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기둥은 원형 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 등 모든 목 부재는 붉은 흙칠(丹土塗)이 아닌 백골마감(白木造)을 보이고 있다.14) 쯔마도(妻戶)는 양 여닫이 판문(板戶)이며 창호에는 격자(格子) 문양을 사용하였다[4].15)
내부공간은 창고나 침실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누리고메(塗籠)16)를 제외하고는 방을 나누는 벽이 없으며 넓은 공간에 둥근 기둥(丸柱)을 세워서 그곳에 미스(御簾)나 키쵸(几帳)처럼 천(布)으로 만든 커튼 류의 쇼지(障子)나 병풍 및 칸막이(衝立) 같은 판넬 류의 쇼지(障子) 등 이동이나 탈부착이 가능한 창호를 사용하여 내부 공간을 구획하는 시츠라이(室礼)17)를 채택하고 있다[1].18) 건물 외부를 도비라(扉)나 시토미(蔀) 같은 개방 가능한 창호로 마감하여 밤에는 문을 닫고 낮에는 개방하는 등 탄력적으로 운영하였다. 실내 공간의 이용 방법에 따라 다양한 칸막이나 창호 등을 사용하여 개방적인 내부 공간을 구성하였는데 이때의 기법은 신덴즈쿠리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19)
이 밖에도 신덴즈쿠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공간별 구성 특징이나 시츠라이(室礼)로 대표되는 내부 공간 구성 방법 및 시기별 변천 양상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가 필요하나, 본 연구가 신덴즈쿠리의 발생 및 성립 과정에 대한 논의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신덴즈쿠리의 공간구성이나 부속시설 및 특징 등에 대해서는 별도의 후속 연구에서 좀 더 상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2.2. 신덴즈쿠리(寢殿造)에 대한 그동안의 일본 건축사에서의 주요 연구의 흐름
일본 건축사에서 구분하는 대표적인 주택 양식으로는 신덴즈쿠리와 쇼인즈쿠리 및 스키야즈쿠리(數奇屋造)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스키야즈쿠리는 쇼인즈쿠리에 차실 건축 양식 등을 도입한 양식으로 근본적으로는 쇼인즈쿠리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면 일본 전통 주거 건축은 주로 신덴즈쿠리와 쇼인즈쿠리로 대별 가능하다. 특히 이 양식들은 각각 당시 고위 귀족이나 무사계층 등 사회상류층 주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와모토 시게오(川本重雄, 2016) 등이 주장20)하는 바대로 오늘날 일본의 화풍(和風)건축의 원류로 자리매김 되는 등 건축사적 가치만이 아니라 오늘날 일본 건축을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건축사에서 신덴즈쿠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편이 아니었다. 헤이안(平安)시대의 귀족들은 저택의 중심이 되는 건물을 신덴(寝殿)이라고 부르고 있기는 하였으나 당시는 신덴즈쿠리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덴즈쿠리라는 용어는 에도(江戸)시대 말기 1842년에 국학자이면서 유학자였던 사와다 나타리(沢田名垂, 1775-1845)의 가오쿠잣코(『家屋雑考』, 1842)21)에서 쇼인즈쿠리라는 용어와 함께 나타나고 있으나 일본 고대주거 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여전히 미미하였다. 당시까지의 일본건축사 연구는 역사적 유물이나 사료가 많은 불교 사원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적이나 유물도 현존하지 않을뿐더러 역사적 사료도 불충분하였던 신덴즈쿠리는 상대적으로 그 관심도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적으로 12세기 후반 이후의 역사적 자료가 극소수 존재하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신덴즈쿠리가 헤이안 시대인 10세기경부터 유행한 양식임을 생각할 경우 이 시기에 대한 판독가능한 배치도나 도면 등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22) 천황이 재난이나 화재 등 유사시에 임시적으로 사용하던 임시 거처인 사토다이리(里内裏) 정도의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규모 귀족주택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는 편이다.
일본 건축사 분야에서는 메이지(明治) 20년대, 즉 1890년대 전후는 일본건축학의 발흥기에 해당하나, 주택의 연혁에 관한 기술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오히려 키고 키요요시(木子淸敬) 등에 의한 일본 국학의 성과가 건축학 분야에 소개되는 정도였다. 건축분야에서의 신덴즈쿠리라는 용어나 표현은 1893년 구루 마사미치(久留正道)가 「미국 박람회 출품 鳳凰殿에 대하여(米国博覽會へ出品の鳳凰殿に就いて)」라는 연설에서 나타난 것이 최초의 예이며, 이로 인해 메이지(明治) 20년대 후반 이후 신덴즈쿠리라는 용어가 건축사 분야에서 학술적 개념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 이후 이토 추타(伊藤忠太)가 집필에 참여한 『일본제국미술 약사(稿本日本帝國美術略史, 1901)』에서는 ‘신덴즈쿠리는 당대에 있어서 귀족의 저택으로 사용된 건축형식’으로 신덴즈쿠리의 형식개념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었으며, 나카무라 타츠타로(中村達太郎)의『일본건축사전(日本建築辞彙), 1906)에도 신덴즈쿠리가 하나의 항목으로 소개되고 있다[2].
그 이후 마에다 마쯔오토(前田松韻)의 『신덴즈쿠리의 연구(寝殿造りの考究) ,1927)나 타나베 야스시(田辺泰)의 『일본 주택사(日本住宅史), 1932』등이 발표되면서 건축사 측면에서 주택 분야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시작되었다.23) 주로 이 시기의 연구는 역사적 유물의 부재나 사료의 부족 등으로 인하여 많은 부분을 앞의 가오쿠잣코(家屋雑考)를 주로 참고하였으며 신덴즈쿠리의 형상이나 배치 등도 여기에 근거하는 수준이었다.24) 신덴즈쿠리나 기타 고대 및 중세 건축 등에 대한 학술적 관심이나 성과는 아다치 야스시(足立康)의 일본건축사(『日本建築史』, 1941)25)을 거쳐 오타 세이로쿠(太田静六)와 호리구치 스테미(堀口捨己) 등에 이르러 활성화되었다. 특히 오타 세이로쿠는 기존의 가오쿠잣코(家屋雑考)만이 아니라 당시 귀족들의 일기 등의 사료를 분석함으로써 신덴즈쿠리의 대(対)를 이루는 건물의 배치나 츄몬로(中門廊) 끝 부분에 위치한 쯔리도노(釣殿)의 위치관계 등을 학술적으로 규정하였으며26) 동시대 자료나 발굴 자료에 근거하여 신덴즈쿠리의 형상을 보이고 있는 히가시산죠도노(東三条殿)의 공간적 특징에 대한 연구27)와 복원을 통하여 신덴즈쿠리의 실체적 진실에 일보 접근하는 학술적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2.3. 역사적 사료 및 발굴을 통한 신덴즈쿠리의 배치 및 형상
전술한 바와 같이 신덴즈쿠리의 실제 유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 건축사계에서의 신덴즈쿠리 연구는 주로 당시 사회상이나 귀족 생활을 묘사한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1008) 등의 문학작품이나 에도 시기에 출간된 가오쿠잣코(家屋雑考,1842)28) 등의 전문 서적 및 교토(京都) 헤이안쿄(平安京) 귀족 주택 매장 유적 발굴이나 호리카와도노(堀河殿) 등 당시 귀족 주택에 대한 복원 등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선, 신덴즈쿠리가 상류 귀족계층의 주거라는 점에서 왕조 귀족의 생활을 묘사한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1008년) 등의 소설 등을 통해 그 모습과 배치 등을 유추할 수 있다. 겐지모노가타리는 일종의 시대소설이기는 하나, 원작자인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는 이 장편 소설 속에서 당시 11세기 초의 신덴즈쿠리의 저택에서 살고 있던 존재이며 소설의 주인공인 겐지(源氏)29)는 ‘헤이안(平安)시대의 공경(公卿) 일세겐지(一世源氏)30)로 근위중장, 대장 등을 거쳐 내대신이나 태정대신(太政大臣) 및 준태상천황(准太上天皇)을 역임하였으며 광대한 4쵸(町)의 저택인 로쿠죠인(六条院)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31)로 묘사되고 있음을 보면, 그가 거주하던 주거 공간 또한 당시 황족이나 귀족의 주생활 등이 거의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객관적인 추측도 가능하다.
「히카루켄지 로쿠죠인 고증복원(光源氏六条院考證復元, 季刊大林 No.34, 1991)」[5]에 따르면, 겐지모노가타리에서 묘사되는 히카루겐지의 저택은 로쿠죠인(六条院)으로 그 규모는 4쵸(町)로 사방 480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부지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당시 헤이안쿄 내에서 공작(公爵)에게 제공되는 부지의 규모가 1쵸(町) 즉 약 사방 120미터였음을 고려하면 히카루 겐지의 권력이 상당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춘하추동을 상징하는 동서남북 각 4개의 영역을 설정하고 신덴(寢殿)을 중심으로 가족이나 식솔들이 거주하는 공간을 배치하였으며 각각의 남쪽에는 호수를 설치하고 있다. 이 가운데 남동쪽의 건물을 보면 7칸의 모야(母屋)와 4면에 히사시(庇)가 설치되고 북측에는 마고히사시(孫庇)가 추가되어 있는 7칸4면(7間4面)의 신덴을 중심으로 동 서측에 5칸 4면에 히로히사시가 설치된 타이야(対屋)와 모야에 한쪽에 히사시만 추가된 북측의 타이야(対屋)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들은 단로(單廊)나 후쿠로(複廊) 형식의 와타로(渡廊)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남측으로는 츄몬로(中門廊)나 스이와타도노(透渡殿) 등의 모습이 보이며 그 끝 부분에는 쯔리도노(釣殿) 가 위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32) 전체적으로는 신덴을 중심으로 하는 대칭구조를 보이고 있는 것도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5][Fig. 2].
다음으로, 가오쿠잣코(家屋雜考)에 기록된 신덴즈쿠리의 배치 및 형상33)을 살펴보면, 「가사쿠엔가쿠(家作沿革)」 항에서 ‘신덴즈쿠리라는 것은 일가(一家), 일구(一構) 내에 그 중앙에 정전(正殿)이 위치하며 남북, 동서 또는 북쪽에 타이야(対屋)라는 것이 위치한다. 정전은 주인의 상주 장소이며 타이야(対屋)는 집안 친족(眷属)이 머무는 장소이다. 또한 정전(正殿)의 앞 쪽 수십 보 되는 거리에 연못(池)을 설치하고 나카지마(中島)를 만들어 그것을 연결하는 다리를 세운다. 또한 동서(東西)의 타이야(対屋)로부터 남쪽으로 뻗어 나가는 복도(廊)가 있으며 그 끝부분에는 쯔리도노(釣殿)나 이즈미도노(泉殿)가 위치한다. 동서측 복도 중간 부분에 소문(小門)이 있으며 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고 내부가 다 보이게끔 되어 있는데 이를 츄몬(中門)이라 한다. 이것들은 일종의 회랑 형식으로 동쪽의 와타도노(渡殿), 서쪽의 호소도노(細殿)와 연결되며 그 내부를 중정(中庭)이라 부른다.’34)라고 신덴즈쿠리의 전체적인 형상을 기술하고 있다[2].
또한 「슈덴(主殿)」항에서는 ‘정식 신덴즈쿠리(寢殿造)라고 하면, 타이야(対屋), 도자이로(東西廊), 츄몬(中門), 이케시마(池島), 쯔리도노(釣殿) 등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항목도 저택의 전체적인 형상에 관한 규정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신덴즈쿠리(寢殿造)」항에서는 ‘신덴(寢殿)을 만드는 방법은 대략 7칸(間) 4면(面)을 원칙(常法)으로 한다. (중략) 통나무 기둥(丸柱)을 사용하며 판자널 마루(板敷)에 지붕은 히와다부키(檜皮葺) 등으로 마감하는 데 이를 시아즈쿠리(四阿造)라고 한다.’는 내용처럼 신덴이라는 건물 한 동에 대한 형식이 설명되고 있다[2]. 즉 가오쿠잣코에 나타나는 신덴즈쿠리는 전사(殿舍) 배치 등 저택 전체의 형식으로부터 개별 건물의 형식까지 포함한 종합적인 형식 개념으로 볼 수 있다.35) 또한 『가오쿠잣코(家屋雜考)』에는 상기의 신덴즈쿠리 형식 개념을 나타내는 그림 세 가지가 실려 있는데, 이는 상기의 내용과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Fig. 3].
이상의 역사적 사료에 나타나는 신덴즈쿠리 배치의 공통적인 특징은 약 7칸 4면의 모야(母屋)와 히사시(庇) 구조에 신덴을 중심으로 동 서측에 타이야(対屋)가 단로(單廊)나 후쿠로(複廊) 형식의 와타로(渡廊)로 연결되어 있으며 남측으로는 츄몬로(中門廊)나 스이와타도노(透渡殿) 등을 거쳐 그 끝 부분에는 쯔리도노(釣殿)와 연못이 위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헤이안쿄(平安京)의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신덴즈쿠리의 이 같은 배치나 형상은 겐지모노가타리가 출간된 11세기 경의 모습으로 추정되며 그 전까지는 이 같은 전형적인 배치나 형상이 보이지 않고 있다.
교토시 매장문화재 연구소(京都市埋蔵文化財研究所)가 후지와라 요시미(藤原良相, 813-867) 저택 등 주로 9 세기경의 귀족 주택을 발굴하면서 정리한 보고서[4]를 보면, 당시 저택에는 건물이 복도로 연결되거나 연못을 중심으로 하는 정원의 유무 등 신덴즈쿠리의 개별적인 구성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종합적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 점, 그리고 9세기 중반부터는 연못이 증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까지는 전체적으로 정원의 유구(遺構)가 보이지 않는 점 등을 이유로 당시까지의 저택은 신덴즈쿠리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이전의 모습으로 규정하고 있다[Fig 4].36) 또한 동 보고서는 이를 신덴즈쿠리 성립 전야의 귀족 주택으로 명명하면서 당시 헤이안쿄(平安京)에 거주하는 귀족들이 신덴즈쿠리라는 건물과 정원이 일체화되는 주택 양식을 성립시킨 것은 10세기 이후로, 그 무대는 10세기 이후 쇠락을 맞는 우쿄(右京)가 아니라 후지와라 가문(藤原家)을 정점으로 하는 셋칸(摂関) 정치가 실시되던 사쿄(左京)였으며 당시 이 같은 셋칸케(摂関家)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사회가 성숙해 가면서 귀족들의 저택에서의 생활양식이 정형화되어 감에 따라 신덴즈쿠리라는 저택 스타일도 확립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4].37)
이 같은 사실에 입각하여 동 보고서에서 신덴즈쿠리의 성립은 도시의 성숙, 귀족사회의 변화, 침전(寝殿)으로부터 좌우로 연장되는 복도(廊)와 다다미 대신 나무판을 깐 이타도꼬(板床), 츄몬로(中門廊)38)나 사부라이로(侍廊)가 나타나는 시기 등을 종합하여 10세기 중반부터 11세기 초엽으로 보고 있다.39)
3. 신덴즈쿠리 배치의 발생학적 영향관계 분석
오오타 세이로쿠(太田静六)나 후쿠야마 토시오(福山敏男) 등의 신덴즈쿠리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궁전건축(宮殿建築)에 기초하면서도 이를 국풍화(國風化)하여 일본 특유의 저택 건축으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하면서 칸표(寛平) 6년(894년) 이후 견당사(遣唐使)에 의한 대륙문화의 수입이 단절되고 이른바 국풍문화(国風文化)의 발전 및 당풍양식(唐風様式)으로부터의 탈피라는 흐름 속에서 신덴즈쿠리의 발생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당(唐)의 문화나 불교의 영향으로 중후한 건축물이 축조된 나라(奈良)시대와는 달리 헤이안(平安) 시대에는 귀족 중심의 문화가 정착하면서 기존의 중국풍 건축과는 달리 격식을 중시한 건물이 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물론 이 같은 논의는 당시의 불교 사원건축 등과 같은 대륙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과 신덴즈쿠리 건축의 특징을 상호비교하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대륙건축은 신발을 신은 채로 실내로 진입하는 도마식(土間式)인데 반해 신덴즈쿠리는 마루식(床張式)으로 신발을 벗고 진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 밀폐식 공간구조에 개실(個室) 중심의 공간구조를 보이는 대륙 건축과는 달리, 신덴즈쿠리는 전면 개방식 구조에 개방적인 오오베야(大部屋)식 공간구조를 보이고 있는 점 및 기와 마감에 붉은 칠을 선호하는 대륙건축과는 달리 신덴즈쿠리는 일본 전래의 히와다부끼(檜皮葺) 마감에 칠을 선호하지 않고 나무 그대로의 색감을 살리는 시라키 마감(白木造)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 점 등의 차이를 들어 신덴즈쿠리가 당시 유행하던 중국 건축의 영향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일본 전래의 문화나 풍토를 반영하면서 나타났다는 주장이 그것이다.40)
그러나 이 같은 양식적인 차이는 신덴즈쿠리에 대륙풍보다는 일본풍 건축 및 공간요소가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유용할 수는 있지만 신덴즈쿠리가 기본적으로 헤이안 시대의 상류 귀족의 저택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경우 이것만으로는 신덴즈쿠리의 발생 시기나 그 원형을 명확하게 단정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따라서 신덴즈쿠리 이전 나라시대의 귀족주택은 물론 그 당시까지 문화의 주류를 이루던 중국 문화나 중국의 주택과의 관계 및 이에 영향을 받은 다이리 등의 궁전 건축 등과의 영향관계를 두루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나라시대의 귀족주택이 다른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에서 불교와의 연관관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주례』 고공기(考工記)에 의거한 중국의 궁전건축이나 사합원 등의 주거건축에 나타나는 좌우대칭이나 각 건물의 기하학적 구성 등은 일본의 헤이죠궁(平城宮) 등 고대 일본의 황실 주거건축인 다이리(内裏)나 귀족 주택 등에 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시기적으로는 가장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이에 영향을 받은 다이리(内裏)와의 영향관계 및 불교건축과의 연관성 등을 순차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에 앞서 신덴즈쿠리는 최소한 헤이안쿄 천도(794년)이후 약 1세기 이상 이전 시대인 나라시대의 귀족주택을 부분적으로 계승한다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그 영향관계를 추적하고자 한다.
3.1. 나라(奈良) 시대의 귀족주택으로부터의 영향
헤이안쿄(平安京)가 793년부터 건설을 시작하여 794년 천도와함께 다이다이리(大内裏)가 축조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보면, 앞서 정의한대로 신덴즈쿠리가 10세기경 헤이안(平安) 시대 교토(京都)에서 성립된 귀족주택 양식이라고 할 경우 약 1세기 이상의 기간 동안은 기존의 귀족주택 양식을 답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신덴즈쿠리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천도 이전 시대인 나라(奈良)시대의 귀족 주택에 대한 참고가 필요함을 의미하고 있다. 특히 고대의 정치 체제가 황권(皇權)과 귀족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신덴즈쿠리는 헤이안(平安)시대에 갑자기 탄생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이전부터의 귀족 주택이 변형 및 발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이 경우 우선적으로 나라(奈良) 시대의 귀족 주택을 살펴보는 것이 유의미할 것이다.
나라시대의 귀족주택에도 이미 세이덴(正殿)이나 와키덴(脇殿) 및 고덴(後殿) 등의 건물이나 창고 등이 발굴조사에 의해 밝혀진 바 있으며41), 8세기 초 나라시대의 후지와라쿄(藤原京)의 귀족주택의 유구 등에서는 부지가 외곽과 내부공간으로 구분하고 내부의 건축물의 배치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세이덴(正殿)이나 신덴(寢殿)은 사면에 히사시를 설치하는 등 신덴즈쿠리와 유사한 점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각 건물은 회랑으로 연결되고 있지 않으며 각각 독립적으로 배치되고 있다[Fig. 5].42)
또한 모야(母屋)+히사시(庇) 구성방법도 나라시대 귀족주택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한 사례인 호류지(法隆寺) 덴보도(伝法堂, 739년)43)의 평면 구성이나 쇼소인몬죠(正倉院文書)44)의 기록에 근거한 후지와라 도요나리 주택의 복원도에서 이미 채용되고 있던 방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건물들은 소규모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모야(母屋)+히사시(庇)의 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각각 3칸(間)x2간(間) 및 2.5칸x5칸의 모야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1칸의 히사시가 설치되어 있다.45) 또한 나라시의 아마가쯔지(尼辻)의 유적 가운데 연못이나 우물, 담장 등이 발견된 사실로 미루어 보면 이 시기의 귀족주택들이 연못 정원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3], 이 같은 특징 또한 신덴즈쿠리의 공간 구성 형식에 연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사실로부터, 신덴과 타이 등의 좌우대칭 배치나 모야+히사시 구성 방법 등은 나라시대의 기법을 계승하고 있으나 회랑으로 각 공간을 연결하거나 연못 쪽으로 회랑을 설치하는 기법은 헤이안 중기에 시작된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46)
3.2. 중국 고대 궁전 및 사합원(四合院)으로부터의 영향
아스카시대나 나라시대의 불교 등 중국문화의 영향을 고려할 경우, 헤이안 시대의 견당사가 페지(894년) 이전까지는 여전히 중국대륙으로부터의 문화나 건축적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특히 신덴즈쿠리의 발생 초기에 해당하는 헤이안쿄 천도(794년) 이후 견당사 폐지까지 약 1세기에 걸친 기간은 앞 서 논한 나라시대의 귀족주택의 연장이면서도 점차 좌우대칭과 회랑으로 연결되는 신덴즈쿠리의 전형으로 진화하는 데 있어서 당나라로부터의 영향이 지속적으로 행사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 같은 영향 가운데 가장 자주 인용되는 것이 중국의 고대 궁전건축이나 삼합원(三合院) 및 사합원(四合院)이다[9]. 47)
사합원을 포함한 중국 전통건축의 기본은 궁전건축으로, 송(宋) 대 이전까지는 『주례』「고공기(考工記)」에 의거하여 직사각형의 기본 틀을 바탕으로 기하학적인 구성 원리에 따라 철저하게 좌우 대칭을 중시하고 있어 매우 엄숙하고 방정한 느낌을 강조하고 있으며 황궁 등의 궁전은 물론 불교사찰이나 도교사원 등의 종교건축물 또한 이 같은 기준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48)
궁전의 경우 장안(長安城) 대명궁(大明宮) 내의 함원전(含元殿)을 보면 일본 궁전이나 나아가 신덴즈쿠리와의 연관성을 유추할 수 있다. 함원전(含元殿)은 대명궁의 제일 정전(正殿)으로서 정월 및 동지의 의식이나 즉위식, 외국 사절의 알현 등 국가 의식을 행하던 공간으로, 662년부터 663년에 걸쳐 동서 200m, 남북 100 m, 높이 15m의 규모로 지어졌다. 중앙 부분에 위치하는 정전(正殿)이 동쪽의 상난각(翔鸞閣)과 서쪽의 서봉각(棲鳳閣)과 회랑(回廊)과 각루(角樓)로 연결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8][Fig. 6]. 이 같은 구성은 동쪽에는 욕당전(浴堂殿)과 온실전(温室殿)이 서쪽에는 연영전(延英殿)과 함상전(含象殿)이 위치한 대명궁(大名宮)의 내전인 자신전(紫宸殿) 등에서 보이는 구성과 일치하는데, 이 같은 사실을 보면 당시 중국 궁전건축은 엄격한 좌우대칭과 중앙의 정전을 중심으로 동서 양측에 건물을 배치하는 형식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배치는 나라 시대 초기 일본의 헤이죠궁(平城宮)의 제 1차 대극전(大極殿) 등에서도 보이고 있으며49) 신덴즈쿠리의 신덴(寢殿)과 타이(対)의 관계 및 회랑 등을 통한 연결 나아가서는 엄격한 좌우대칭의 유지 등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또한 [Fig. 6]의 평면에서 보이듯이 카와바시라(側柱)와 이리카와바시라(入側柱)로 구성되는 모야와 히사시 구성도 중국의 궁전건축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신덴즈쿠리의 신덴과 타이의 배치는 중국 고유의 주거형태인 사합원(四合院)에서의 중심건물인 정방과 좌우 상방의 배치관계와 일치하고 있으며 그 기능 또한 가장의 거처로서 조상의 위패를 모시거나 거실로 사용하는 정방에 비해 상방은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는 점도 유사하다. 남북으로 길게 하인이나 손님이 거주하는 도방이 양측으로 설치되는 것도 신덴즈쿠리와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 건물이 좌우대칭을 이루는 점 등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50) 특히 불교가 쇠퇴기에 접어든 당나라 시기의 사합원은 상방(廂房)의 존재는 당시에는 나타나고 있지 않으나 두 개의 정원의 존재 및 3칸으로 구성된 좌우대칭의 건물군과 회랑으로 연결된 건물 형태 등 이른바 일전이루(一殿二樓)식 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정원과 연못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51)을 보면 신덴즈쿠리가 당(唐)대의 귀족주택과 더욱 근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7][Fig. 7].52)
그러나 중국의 건축사학자 및 다나카 탄(田中淡) 등의 중국 건축사학자들이 당(唐)대는 사합원 주택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음을 보면 현재 알려진 폐쇄적인 사합원의 모습에서 약간의 변형이 있을지라도 당(唐)대에도 역시 기본적으로는 사합원이라는 구성방식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면에서 보면 신덴즈쿠리는 중국 고대의 궁전건축이나 사합원 주거 형식을 기초로 하면서 당(唐)대의 귀족 주거 형식을 대부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견당사 파견 기간(639-894) 중에는 당 대의 문화 및 주거형식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907년 당(唐)이 멸망한 이후 신덴즈쿠리는 국풍문화(國風文化) 등 당시의 일본화 경향을 반영하면서 독자적인 양식이 가미되고 있으나 최소한 헤이안 시대(794-1185) 전기는 여전히 당(唐)으로부터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3. 다이리(内裏)로부터의 영향
다이리(内裏)53)는 고대 도성의 궁성에서 천황이 거주하는 사적 영역 즉 황거(皇居)를 말한다. 나니와 궁(難波宮)이나 후지와라 궁(藤原), 나가오카 궁(長岡宮) 및 헤이조 궁(平城宮) 등은 그동안 조사 및 발굴이 이루어졌으나 헤이안 궁(平安宮)은 거의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당시 다이리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쉽지 않으나,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각종 고서(古書)나 고도(古図) 및 에도(江戶) 시대의 고전학자(有職故実)인 우치마쯔 미쯔요(家裏松光世)가 저술한 『다이다이리 고증(大内裏図考証)』등의 자료에 의해 다이리의 건물 배치나 규모 등은 어느 정도 파악되고 있다. 다이리는 헤이조 궁(平城宮)까지는 정무(政務)의 중심시설인 쵸도인(朝堂院)의 정북 방향에 위치하였으며 나가오카 궁(長岡宮)이나 헤이안 궁(平安宮)에서는 쵸도인의 약간 동쪽으로 옮겨져 설치되었다. 이는 공적인 쵸됴인과 천황의 사적 공간을 분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율령체제(律令体制) 하에서는 오히려 다이리가 정치의 중심적인 장으로, 쵸도인은 의식이나 행사의 장으로 그 기능이 변질되었다.54)
조사 및 발굴에 따르면, 헤이조 궁(平城宮)은 쵸도인의 북쪽에 위치하였으며 쯔이지(築地) 회랑(回廊)으로 둘러싸인 사방 약 180미터의 정방형 지역으로 남측에는 동서 9칸(間), 남북 54칸(間) 규모의 정전(正殿) 등을 회랑으로 둘러싼 구획이 있으며, 주로 공적인 연회 등을 개최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북측에는 정전(正殿)보다 약간 작은 규모의 건물들이 배치되었으며 천황이 기거하는 사적 영역으로 기능하였다. 쯔이지 회랑으로 둘러싸인 내곽 외측에 또 하나의 외벽을 설치하여 이중벽 구조를 이루고 있다. 정전 등의 건물은 히와다부끼(檜皮葺)에 마루가 깔린(板敷き) 형태가 주를 이루었으며 전체적으로는 모든 건물들이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었다. 이 같은 배치나 형상은 나가오카 궁(長岡宮)이나 헤이안 궁(平安宮) 등에서도 다이리의 위치나 규모가 조금 상이할 뿐 이중 구조나 회랑 연결 방법 및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 등은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55)
다이리는 전체적으로는 본전(本殿)을 중심으로 동서 및 북측에 대(對)를 이루는 일종의 타이야(対屋)가 위치하며 이들은 모두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각 부속건물이 복도로 연결된 형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남측은 광장이나 정원이 위치하며 공적 행사나 연회 등 공적 공간으로 활용되며 북측의 타이야(対屋))는 개인적인 사적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좌우대칭의 특징은 17전(殿) 5사(舎)의 건물들이 좌우대칭으로 배치되고 있는 헤이안궁(平安宮)처럼 거의 모든 경우에서 그 특징이 보이고 있다. 또한 모든 다이리는 벽과 담장을 이용하여 이중으로 둘러싸인 모습이었으며 이로 인해 폐쇄적인 동심원적 공간 질서를 지니고 있는 것도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Fig. 8].56) 이 같은 면에서 카와모토 시게오(川本 重雄, 2016) 는 신덴즈쿠리가 건물의 배치 등 일정 부분에 대하여 중국의 사합원(四合院)에 기인하면서도 마룻바닥의 설치나 남쪽 정원을 향한 내부공간의 개방성 등의 측면에서는 중국의 사합원과는 본질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이는 주로 일본의 궁중건축에서 건물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인 테이기(庭儀)를 위한 건물, 즉 다이리(內裏)의 시신덴(紫宸殿)이나 그 일부를 신덴즈쿠리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1]. 그는 특히 신덴즈쿠리의 개방적 실내구조를 중점으로 당시 궁정건축과의 연관성을 지적하였는데, 특히 궁중에서 행해지는 즉위식 등의 성찬(大饗)이 이루어지던 다이고쿠덴(大極殿) 등에서는 남쪽으로 개방되어 있으며 건물 정면 측에 벽이나 문이 없는 개방적 구조였음을 밝히고 있다[Fig. 9]. 또한 이로 인해 다이고쿠덴(大極殿)처럼 정전(正殿)과 남측 정원이 일체가 된 공간에서 의식을 행하는 장소에서는 정원 의식인 테이기(庭儀)의 무대가 되는 정전(正殿)과의 공간적 연속성이나 일체감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 결과 남면을 개방한 건물이 되며 이처럼 궁전건축에서의 테이기(庭儀)를 위한 개방적 공간 구성이 신덴즈쿠리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이 같은 주장은 헤이안 초기 시시이덴(紫宸殿)과 진쥬덴(仁寿殿)을 각각 업무공간과 사적 공간으로 활용하다가 중기 이후에는 세이료덴(清涼殿)이 각각의 업무를 겸하였으며 10세기 이후 셋칸(摂関)이나 구교(公卿) 등 천황과 사적 관계에 있는 정치기구가 발전하고 승전제(昇殿制)57) 등이 성립하면서 조당이나 조정(朝庭)에서의 대규모 의식 대신 천황의 정원이나 실내공간에서 의식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아카자와 마리(赤澤 真理)의 주장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9]. 따라서 헤이안 시기의 대부분의 궁중 연회는 거의 대부분 다이리(內裏)의 정전(正殿)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정월대향연(正月大饗)이 이루어지던 대신(大臣) 저택인 신덴즈쿠리는 다이리의 정전의 의식공간을 그 모델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덴즈쿠리의 개방적 모야(母屋) 공간이 다이리의 시신덴(紫宸殿)과 공통점이 많은 뿐 아니라 회랑으로 연결되는 신덴즈쿠리의 특징도 궁전건축과의 연관을 보여주는 요소 가운데 하나로 헤이조궁(平城宮)의 다이리(內裏)에 대한 발굴 조사에 따르면 정전(正殿)과 주변의 4개의 건물 주위에 회랑이 설치되어 있으며 그 회랑은 동서쪽이 단로(單廊) 북측이 후쿠로(複廊) 그리고 남측이 츠이지(築地) 회랑으로 되어 있음을 보면 신덴즈쿠리의 공간 연결 방법이 이미 다이리에서는 정형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
3.4. 불교 사원 가람배치로부터의 영향
앞의 내용에서 언급했듯이, 1893년 구루 마사미치(久留正道)가 「미국 박람회 출품 鳳凰殿에 대하여(米国博覽會へ出品の鳳凰殿に就いて」라는 강연에서 ‘(전략) 고문서나 고화(古畫)를 보아도 신덴즈쿠리의 형상은 알 수 있으나, 간단히 말하자면 마치 신사불각(神社佛閣)과 같은 형상으로 문이나 쇼지(障紙) 등의 내부 칸막이는 전혀 없고...(후략)’이라고 말한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덴즈쿠리는 그 형상이 독창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기보다는 신사 불각 등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종교 건축물로부터 어느 정도 형태적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58)
이 같은 사례는 우선 불교 사원의 가람 배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에서의 본격적인 사원건축의 조영(造營)은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된 아스카(飛鳥) 및 나라(奈良)시대부터 시작된다. 당시의 가람배치의 유적에 의하면 그 구성은 중국이나 백제의 가람배치를 모방하여 기본적으로는 탑, 금당, 강당과 그것을 둘러싸는 회랑과 중문 등으로 구성되고 있다[6]. 일례로, 불교가 최초로 유입된 아스카(飛鳥) 시대의 아스카지(飛鳥寺)의 가람 배치는 오중탑(五重塔)을 중심으로 그 북쪽에 중금당(中金堂)이 위치하며 동 서측에 각각 동금당(東金堂) 및 서금당(西金堂)이 위치하는 이른바 1탑 3금당식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Fig. 10]. 그리고 이들 1탑과 3금당을 회랑(回廊)이 둘러싸고 있으며 회랑의 정남면에 중문(中門)이 위치하였다. 강당(講堂)은 회랑 외부의 북측에 위치하였다. 또한 이 건물들을 둘러싸듯이 토담(築地塀)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중문(中門) 바로 남쪽에는 남문, 북측에는 북문, 서측에는 서문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굴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59)
이 같은 아스카지의 가람배치는 전체의 중심이 되는 건물(아스카지에서는 탑)을 중심으로 동 서측 및 북측에 일종의 부속 건물인 타이(対)의 존재와 이들을 연결하는 회랑(回廊)으로 구성되는 신덴즈쿠리의 기본적인 구성과 유사하다. 특히 전체 구획을 토담으로 둘러싸 폐쇄적인 영역성을 확보하면서 공적 영역(부처의 공간)과 사적 영역(생활공간)영역의 구분이 명확한 공간 구성도 신덴즈쿠리의 기본적인 공간 구성기법과 동일하다. 또한 동서남북에 문을 설치하는 방법이나 중문(中門)의 위치가 남쪽에 설치된 점 등 전체적으로 남향 중시 경향에서도 신덴즈쿠리와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이 같은 특징은 탑과 금당을 일직선으로 배치하는 시텐노지(四天王寺) 형식, 동서 대칭으로 탑과 금당이 배치되는 호류지(法隆寺) 형식, 금당이 중심이 되면서 동서로 탑이 대칭을 이루는 야쿠시지(藥師寺) 형식 및 동서 양 탑이 회랑 외부에 설치되는 도다이지(東大寺) 형식 등 다른 유형의 가람배치[6]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이들 모두는 중심이 되는 금당이나 탑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대(対)를 이루는 존재 및 토담(築地塀) 등에 의한 폐쇄적인 영역성 등을 보여주고 있다[Fig. 10].
또한 동서 금당이 이중기단(二重基壇)으로 구성된 것을 보면60) 단죠즈미(壇上積) 기단으로 구성된 중 금당이 이들보다 격이 높은 가장 중요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아스카지의 중 금당이 신덴즈쿠리에서의 중심 건물인 신덴(寢殿)으로 치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일반적인 신덴즈쿠리가 모야와 히사시의 결합으로 구성되고 당시 건축 기술의 제한 등으로 인하여 모야의 측면 규모가 2칸(間)으로 고정되고 있다는 앞의 3.1의 내용을 상기해 보면, 신덴즈쿠리에서의 신덴(寢殿)과 아스카지의 금당의 연관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4. 결론
이상에서 일본 주거건축의 원형 가운데 하나인 신덴즈쿠리의 공간적 및 건축적 특징을 살펴보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궁전 및 주거 건축과의 발생학적 연관관계의 추적을 통해 신덴즈쿠리의 배치나 형상의 발생 및 성립에 대한 영향관계를 파악하였다. 헤이안(平安) 시대의 귀족주거로 정의되는 신덴즈쿠리는 그 유적이나 유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초기형태나 발전과정 등을 자세하게 알기는 어려우나, 헤이안 시대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 등의 역사 문학작품이나 에도(江戶) 시대의 가오쿠잣코(家屋雑考) 등의 역사적 자료를 통해 그 형태나 구성을 가늠할 수 있으며 최근에는 헤이안쿄(平安京)의 발굴이나 건축사학자들에 의한 히가시산죠도노(東三条殿) 의 복원 등에 힘입어 당시의 신덴즈쿠리의 구체적인 배치나 형상 및 내부 공간 등에 대한 단서가 제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자료에 근거한 신덴즈쿠리의 배치나 형상은 11세기경 신덴즈쿠리가 정착한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발전과정이나 영향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헤이안쿄 천도(794년) 이후부터 11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 신덴즈쿠리의 배치나 형상에 영향을 끼친 다양한 발생학적 요인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본 연구에서는 이를 위해 신덴즈쿠리 이전 나라시대의 귀족주택은 물론 그 당시까지 문화의 주류를 이루던 중국 문화나 중국의 주택과의 관계 및 이에 영향을 받은 다이리 등의 궁전 건축 등과의 영향관계를 살펴보았으며 나라 시대 및 헤이안 시대 중기까지도 귀족주택이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에서 불교와의 연관관계도 분석하였다. 이상의 분석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다수의 역사학자들의 주장대로 신덴즈쿠리는 한편으로 나라시대의 귀족주택의 모야+히사시 방식을 전수하면서도 중국의 궁전건축이나 사합원(四合院) 등을 참고하여 정전(正殿)이나 정방(正房)을 신덴(寢殿)으로 치환하고 당(唐)의 일전이루(一殿二樓)식 구성 등을 따라 동서 양쪽에 타이(対)를 설치하는 기법이나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는 기법 및 이를 와타도노(渡殿)나 스키와타도노(透渡殿) 등의 회랑 등을 이용하여 연결하는 방식 등을 채택하고 있다.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다이리(內裏)나 불교 사원(寺院) 등에서도 신덴즈쿠리의 영향관계가 발견되는데, 대표적으로 정전을 중심으로 하는 동서 3열 배치와 좌우대칭 및 회랑(回廊)의 존재나 모야(母屋)+히사시(庇) 공간구조 등이 일치하고 있다. 이를 종합하여 도식으로 나타내면 [Fig. 11]과 같다.
그러나 이 같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신덴즈쿠리는 중국의 궁전이나 사합원 및 사원 건축 나아가 나라(奈良)시대의 귀족주택과는 달리 외부를 향해 개방된 구조 및 배치를 보이고 있는 등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당시 정원에서 행사나 연회를 자주 개최하던 다이리(內裏)에서의 기능이 신덴즈쿠리에 적용된 것으로, 중국의 영향관계를 벗어나 일본적 필요성을 강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헤이안 시대(794~1185년)가 최소한 초기에는 당(唐)으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이던 견당사 기간(630년~894년)을 통해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고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당의 문화와는 독자적으로 일본적 문화나 풍토를 반영하게 되는 역사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본 연구에서는 신덴즈쿠리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인 신덴(寢殿)과 타이(対)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건축물 배치의 발생과 성립에 대한 논의와 분석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는 신덴즈쿠리의 건축사적 의미와 공간적 특징 등을 살펴보는 연구를 위한 선행연구로서, 향후 후속연구를 통해 신덴즈쿠리의 공간적 구성이나 시기별 배치의 공간 변화 및 특징 등을 추가적으로 분석할 예정임을 밝혀둔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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