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법광사 석탑과 금당의 배치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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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ccording to the excavation survey, the scope of the site extended to the current Geumdangji area in the 9th century and the pagoda was relocated. According to the excavation survey, the area of Geumdangji was extended to the current area of Geumdangji in the 9th century, and there was a change in the relocation of the pagoda. The pagoda was not identified in front of Geumdangji. As it is now, the pagoda is located in the west of Geumdang, and the layout of the pagoda's center appears to have been completed as it was relocated and rebuilt. These arrangements are also found in royal shrines and pagodas built outside the royal palace in the 7th and 8th centuries, including Goseon Temple Site, Changnim Temple Site, Hwangbok Temple Site, and Nawonla Temple Site. It appears to reflect a particular type of arrangement or complex religious inclinations at the time.
The pedestal of the first floor of the pagoda and its curved pedestal are inherited from the original royal pagoda of the 9th century. It can be seen as evidence that the unique style of decoration has been inherited by a group of experts or artisans in the construction of the pagoda.
During the reconstruction of the pagoda in 1747, there was a change in the construction of a shrine (Geumgang Stairway) and a chapel, Hyangrojeon, in front of the pagoda, imitating Tongdosa Temple, but it seems that the layout of the shrine in the east and the pagoda in the west remained the same.
Keywords:
Excavation survey, Geumdangji, pagoda, Royal shrines키워드:
발굴조사, 금당지, 석탑, 왕실 원당1. 서론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포항 법광사지(法光寺址, 사적 제493호)는 영조 26년(1750)에 찬술한「법광사석가불사리석탑중수비」에 신라 진평왕(579년∼632년)의 원당으로 원효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했고, 흥덕왕 3년(828) 7월에 건탑한 뒤 문성왕 8년(846) 9월에 석탑을 이건하면서 사리 22과를 봉안한 기록이 있다. 당시 법광사는 당우가 525칸으로 불국사와 함께 신라 대가람이었다. 그 뒤 흥망성쇠를 거듭한 뒤 조선 영조 22∼23년(1746∼1747)에는 석탑, 2층 금당, 5칸 대웅전만 남았다. 1747년에 석탑을 중수하고, 통도사를 모방하여 석탑 앞에 법당인 금강계단과 그 아래 예불소인 향로전을 건립해 전환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철종 14년(1863)과 뒤이은 화재로 결국 폐사했다.
법광사에 관한 연구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었고, 1964년 석가불사리석탑연구, 1969년에 사지 실측조사, 1970년 석탑기 연구, 1992년 지표조사, 2010∼2017년에 사역확인을 위한 시굴과 발굴조사가 있었다. 조사결과, 금당지, 당간지주 영역에서 통일신라∼조선시대의 건물지 및 담장지, 석축 등이 수 차례 멸실·건축이 반복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그 동안 법광사의 가람배치는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1탑1금당과 달리 금당 서쪽의 높은 지대에 별도로 위치해 있어 후대의 변형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간의 지표・발굴조사에서 석탑과 금당의 배치관계를 명확히 밝힌 연구는 없었다. 이에 본 연구는 선행연구와 발굴조사를 분석해 석탑과 금당의 위치로 본 배치관계와 동 시기 가람과 비교해 그 특성을 분석해 보고자 했다.
1.2. 연구 방법 및 범위
그간 법광사에 관한 연구는 문헌 및 지표조사만 이루어져 통일신라시대 가람배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금당지와 건물지 그리고 석탑지의 위치 등이 밝혀져 추후 실증적인 분석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발굴조사 중간보고서 등에 당시 석탑과 금당의 배치를 명확히 분석한 것이 없으므로 본 연구방법은 선행연구와 함께 발굴조사 결과를 분석하였다. 이에 2장에서 현존 금당지와 석탑의 현황 및 특징, 3장에서는 발굴조사에 확인된 석탑과 금당의 배치관계를 동 시기 및 이와 유사한 배치의 가람과 비교해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연구범위는 그간 발굴자료를 검토하되 금당지 영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 외는 참고자료로 활용하였다.
1.3. 선행연구 고찰
법광사에 관한 문헌고찰은 박일훈1), 황수영2), 박남수3)의 연구가 있다. 이들은 회창(會昌) 6년(문성왕 8년, 846)4)에 작성된 것과 건륭(乾隆) 12년(영조 23년, 1747)5)에 작성된 「법광사석탑기」, 건륭 15년(영조 26년, 1750)에 찬술한「법광사석가불사리석탑중수비」6)를 분석 고찰했다[1-2].
흥덕왕 3년(828)에 건립된 석탑은 신라 하대 석탑 연구에 주요한 자료인 점, 성덕대왕(金鈞貞)이 사단월(寺檀越)이었다는 명문은 그의 가계에 속하던 왕실의 원찰이었다는 것과 그후 집권한 김균정의 직계인 신무·원성 등 제왕에 의하여 가호되었다는 점을 파악했다7). 또「법광사석탑기」를 통해 기존‘성덕대왕전(聖德大王典)’를 태부전(太傅典)처럼 성덕대왕과 헌강왕대왕을 추복하기 위한 관사8)로서 각각의 원당을 관리내지 제전(祭奠)를 관장하는 기능으로 파악했다[11]9). 즉, 회창 6년(846)에 석탑 이건은 동 사찰의 중창을 예비하는 사전조치로‘성덕대왕전’과 관련된 것이었다. 성덕대왕전의 향순은 법광사의 단월이었고, 법광사가 석탑을 이건할 무렵에 왕실 원찰로서 중창된 것으로 해석했다.
지표 및 실측조사는 박일훈의 「법광사의 석가불사리석탑비」, 동국대박물관의「신라법광사지 제1차 실측조사개요」, 국립경주박물관의 「법광사의 지표조사」가 있다[3]. 박일훈은 전 사역이 경지로 변한 곳에 대웅전지, 쌍귀부일좌, 당간지주, 석탑 1기, 석탑비, 석불좌상 2구, 예배석 1기를 확인했다. 특히 금당지를 대웅전지로 표기했고, 삼층석탑은 대웅전지의 남서쪽에 석가사리석탑비와 함께 위치한 것을 확인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사역 초입의 논 가운데 당간지주가 있고, 그 서북쪽의 밭 가운데 큰 불상대좌가 남아 있는 큰법당터를 확인했다. 큰법당터 동쪽 앞에는 남북 1열로 놓인 6개의 초석이, 서쪽에는 남북 1열의 초석을 확인했다. 큰법당터의 서북쪽 언덕 위에는 토담 속에 석탑과 비석이 위치하고, 그 동쪽에는 2열의 초석이 잔존하는데 이는 엄격한 가람배치가 흐트러진 뒤의 건물터로 보았다. 2010∼2017년에는 사역확인을 위한 시굴과 발굴조사가 있었다. 조사결과, 금당지, 당간지주 영역에서 통일신라∼조선시대의 건물지 및 담장지, 석축 등이 수 차례 멸실·건축이 반복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상, 선행연구는 문헌, 지표, 발굴조사가 있었으나 금당지・석탑과 동시기의 가람배치를 밝힌 연구 및 분석은 없었다. 이에 본 연구는 선행연구를 토대로 그간의 발굴조사 결과를 분석해 통일신라시대와 법광사지의 석탑과 금당의 배치관계를 비교해 그 특성을 밝힌 점이 특징이다.
2. 법광사 삼층석탑과 금당지 분석
2.1. 삼층석탑
「법광사석탑기」와「법광사석가불사리석탑중수비」를 통해 석탑은 조성(828)과 이건 및 사리봉안(846), 중수(1747) 등 일련의 시기적 변화가 있었다.
그간 연구에서 석탑은 흥덕왕 3년(828) 7월에 김정균 가계에 속했던 원찰에 건탑되었다. 839년에 신무왕이 왕위쟁탈전에 죽은 선친 김정균을 성덕대왕으로 추봉했고,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 8년(846) 9월에 석탑을 이건하면서 사리 22과를 봉안했다. 조선 영조 22∼23년(1746∼1747)에 석탑을 중수하고 사리 22과를 재봉안했고, 통도사를 모방해 석탑 앞에 법당(금강계단)과 예불소(향로전)을 건립했다. 즉 법광사는 신라 하대 왕위쟁탈전 시기에 진평왕 직계로 피살된 김정균 원당으로 건립된 뒤 신무·문성·헌안 등 이후 집권 제왕들의 명복을 비는 발원과 지원이 이루어진 왕실 원당이었다10).
이는 당시 왕실의 원당 건립 성격과 기복석탑(祈福石塔)11)의 유행이 경향각지(京鄕各地)에 이루어졌던 추세와도 무관하지 않다12).한편 왕족 원당 중에 건탑한 후 불상·사리 등을 석탑에 봉안한 예는 황복사지 삼층석탑13), 창림사지 삼층석탑14)[11] 도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국왕 및 왕족, 호족의 원당 및 건탑은 9세기대 석탑의 전국화 현상과 맞물려 다양한 계층으로 확산되던 시기에 이루어졌다[4]15).
법광사 삼층석탑16)의 조형적 특징은 이중기단의 초층 탑신받침에 별석받침과 굽형괴임대를 둔 것이다. 특히, 이중 굽형괴임대는 창림사 삼층석탑(8세기대)을 필두로 법광사 삼층석탑(828),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863년), 도피안사 삼층석탑(865년), 성주사 4기의 석탑(9세 후기)으로 계보를 잇는다. 이들 석탑은 국왕 및 왕족 또는 그들의 적극적인 비호하에 있던 지방호족 원당에 건립된 9세기대 석탑에 공통점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또 초층탑신 사리구(납석·청동재 사리호를 매납한 법광사・동화사 비로암・취서사 삼층석탑, 발원탑기의 창림사지 삼층석탑)를 갖춘 특징을 갖는다. 9세기대 석탑은 초층탑신에 사리안치와 초층탑신 및 상·하층기단에 장엄조식이 유행했다17). 창림사 삼층석탑을 제외한 법광사 삼층석탑,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도피안사 삼층석탑, 성주사 석탑에는 상층 기단면석에 장엄조식이 없는 점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9세기대 다양한 계층으로 번진 건탑과 다양한 장엄장식이 유행하던 시기에 국왕 및 왕족의 원탑은 건립주체 및 성격만큼이나 봉안물, 조형양식에서 시기적 특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2. 금당지
금당지는 내·외진부를 벽체로 구분된 내외진 이중식18)의 回자형 감실형 평면이라고 하는데, 내진주사이에 벽체를 둘러 불상 봉안부를 폐쇄적인 감실로 조성했다19) .내진주 사이에 불전을 설치한 것은 내진주 전체를 감실로 만든 다음 감실 안에 오로지 불보상만을 봉안하고, 내진벽과 외진주 사이에는 요잡을 위한 공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요잡이라는 예불 행위를 함께 고려하여 내·외진 이중형식의 불전을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내·외진에 출입문과 기단에 전·후면 또는 사면에 계단을 설치하기도 했다. 국립경주박물관 지표조사에서 기단 지대석 위에 전돌 쌓은 전축기단 일부를 확인했다. 무너진 뒤채움부에서 고려·조선시대 와편이 확인되어 전축기단인지, 가구식기단에서 전축기단으로 바뀐 것인지는 알 수 없다20). 금당지에서 녹유전이 수습되었다. 녹유전은 영묘사지, 황룡사지, 사천왕사지, 감은사지, 천룡사지, 부석사 등 당시 높은 사격의 사원에서만 사용된 예가 있다. 녹유를 분석한 결과, 부석사, 천룡사지의 납동원소비와 동일 그룹을 형성했다[5]. 통일신라시대의 녹유전돌의 녹유는 사용 원료 및 제조 방법은 동일하나 두 개 지역에서 납광석을 입수하여 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같은 성격의 녹유전이 여러 사찰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녹유전돌 생산을 위한 제작소가 별도로 마련하고 공급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21).
통일신라시대의 回자형 감실형 금당은 법광사지 금당(9세기)22), 영암사지 금당(9세기)23), 화엄사 각황전(삼국, 1702년 중건)24), 발해 상경성 제1절터(8∼9세기)25)처럼 내·외진에 모두 벽체로 구성했다26). 금당의 평면 규모는 동일한 예가 없고, 정·측면 규모는 황룡사 중금당(통일신라)27)과 거돈사지 금당(나말여초)28), 발해 상경성 제1절터보다는 작고, 영암사지 금당, 발해 상경성 제9절터(8∼9세기)29)보다는 큰 중간 규모이다. 정·측면의 평면비는 1:0.9로 영암사지 금당 1:0.94와 비슷하다30). 주칸 설정은 어칸〉협칸〉퇴칸 순으로 거돈사지 금당과 동일하다. 또 내진의 중앙에 사천주와 그 중앙에 독존 불대좌를 안치하고, 사천주 후면 기둥간에는 후불벽을 설치했다. 내진 중앙에 독존 불대좌는 거돈사지 금당, 영암사지 금당에 보이지만 내진에 사천주와 후불벽이 확인된 예는 없다. 한편 내진 고맥이석 상면 치수로 본 내진 벽체의 폭은 180mm로 거돈사지 금당 240mm, 영암사지 금당 260mm, 황룡사 중금당 300∼550mm에 비해 작고, 발해 상경성 제1·9절터 150mm보다는 크다31) .
건물 상부 가구구조는 주좌·주흔의 직경으로 비교검토한 결과, 내진이 외진보다 큰 경우로 황룡사 중금당, 거돈사지 금당과 동일한 양상이다. 이는 가구 및 구조적으로 내진고주를 사용한 대량식의 가구유형 중에 청당식(廳堂式)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9]32).
3. 석탑과 금당의 배치 분석
3.1. 입지 및 대지조성
법광사지는 경주시내에서 북쪽 30㎞지점에 위치한 신광면 비학산(762.3m) 정상에서 북동쪽의 주능선에서 뻗은 가지능선 말단부인 해발 179m∼206m에 위치한다. 비학산은 신라시대 소사(小祀) 중 하나인 비약산(非藥山, 退火郡)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또 신광면33)은 왕경에서 북쪽의 안강을 지나 북방 진출로인 왕경북로의 길목에 해당된다. 또 왕경을 침입한 왜병의 퇴각로상에 전투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법광사지가 위치한 신광면은 신라의 북방 주요 교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군 요충지로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법광사지의 대지조건은 산으로 둘러싸인 골 깊은 골짜기 끝에 사역 서쪽에서 동류하는 개천과 맞닿아 있고, 동남쪽으로 열린 계단식 곡간평야와 멀리는 동해까지 조망되는 좌향을 취한다. 사역은 비학산 동록의 산자락을 계단식 대지를 조성한 뒤 주요 전각을 서→동쪽으로 배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역은 금당지 동쪽의 당간지주 구역은 담장으로 구획된 당간지주를 중심으로 남·동쪽으로 인접하여 교란 및 중복 건물지와 동쪽으로는 연지, 서·북쪽에서도 건물지가 각기 확인되었다. 특히 이곳의 건물지에서 고식 단판연화문수막새와 단각고배 등이 출토되어 문헌상에 진평왕 원당이란 창건설과 관련된 창건기 사역으로 추정된다. 창건기 추정 사역에서 약 100m지점의 서쪽에 현 금당지 영역이 위치하고, 금당지 남서쪽 30m 지점에 삼층석탑이 위치한다.
현 금당지과 삼층석탑 주변영역은 창건기 이후의 통일신라시대 극성기에 조성된 산지가람의 사역으로 추정된다. 그간 발굴조사에서 창건기 사역에서 지금의 금당지쪽으로 사역을 옮겨 525칸 당우의 대가람을 이룬 극성기를 맞았다. 사역의 이동에 맞춰 석탑도 이건하고 사리를 봉안했다. 다만 금당지 주변 발굴조사에서 석탑지가 확인되지 않았다. 금당 서쪽 언덕 위에 있는 석탑구역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단언하기는 이르다. 하여튼 금당지 전방에서 석탑지가 발견되지 않아 지금처럼 석탑이 금당과 별도의 영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려・조선시대에 사역의 확장・축소와 전각의 멸실・건축 등 흥망성쇠가 여러 차례 반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당지와 동시기유구로는 남서쪽 언덕에 삼층석탑, 동쪽(전방)에 凹자형 석축, 금당 서쪽(후방) 언덕(숭안전 터) 위에 ㄷ자형 대형건물지 등이다. 고려・조선시대에 凹자형 석축 앞과 북쪽으로 각기 사역을 확장하여 전각 및 시설이 배치되는 등 사역의 변화가 있었다[12-16].
3.2. 석탑과 금당의 배치관계
현재 석탑 구역은 미발굴지로 그간 발굴에서 금당지 전방에서 석탑지가 확인되지 않았다. 금당지 전방이 아닌 별도의 위치에 석탑34)이 존재하는 1탑1금당형식으로 추정된다35). 건탑(828)후 18년 뒤에 이건(846, 사리봉안)되면서 금당과의 배치내지 배치형식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지금 석탑이 금당지보다 좀 더 높은 후방(서남쪽)에 떨어져 별도로 위치하고 있는 것이 856년 석탑 이건과 사리봉안 당시의 위치로 추론해 볼 수 있다. 금당지 영역의 발굴결과에서 금당지 관련 유구는 전방 20m지점에서 지형에 맞춰 잔존 길이 51m, 양단부 높이가 2m내외로 축조한 凹자형 석축이 있다. 금당지와 동일 축선으로 축조한 一자형 석축에 양단부가 대칭으로 돌출된 凹자형을 이룬다. 금당지에 남은 초석, 고맥이 등의 가공 수준과 달리 석축은 자연석을 다소 엉성하게 축조한 점이 사뭇 대비된다36) 凹자형 석축은 고려시대 이후로 사역 확장에 따라 성토매립하고 그 위에 후대 건물지 및 시설이 조선시대까지 반복해 들어섰다.
금당 전방의 凹자형 석축 예는 불국사와 영암사지가 있다. 2탑1금당식인 불국사는 대웅전영역의 동·서 회랑 각 남단에 돌출된 석축 겸 기단에 좌경루와 범영루를 두었다. 1탑1금당식인 영암사지의 창건기 가람에 석탑 전방의 동회랑 석축과 양단에 이런 돌출부가 남아 있다. 이들 석축은 산지가람에 중심영역의 위계성 및 대지와 공간 연출기법의 하나로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석축 양단의 돌출부의 기능에 대해서는 명확치 않다(Fig.14. 참조). 凹자형 석축의 축조재료 및 쌓기법은 불국사(8세기)가 가공석+자연석 조합에 쐐기돌37) 사용, 영암사지(9세기)는 가공석(장대석)+쇄기돌을 공통적으로 사용한 반면 법광사지는 자연석 허튼층쌓기로 왕경에 버금가는 건축 석부재가 사용된 것과 비교된다.
출입동선은 불국사가 석축 중앙의 청운·백운교 계단을 통한 정면진입 방식, 영암사지는 凹자형 석축의 북단과 남단의 회랑 2곳을 통한 정·측면진입 방식이다. 법광사지 凹자형 석축에서 출입시설이 확인되지 않아 영암사지와 유사한 출입동선으로 추정된다. 또 하나 법광사지에서 주목되는 것은 타 가람처럼 금당 주위에 회랑이 확인되지 않았다. 후대 멸실된 것인지는 명확치 않다. 이처럼 법광사지 금당지 영역에서 큰 특징은 석탑이 금당보다 지형상 높은 서쪽 지대에 별도로 위치한 점, 凹자형 석축, 회랑이 확인되지 않은 점, 금당 전방에 석탑지가 확인되지 않은 점 등이다. 1747년에 5칸 대웅전, 2층 금당, 석탑만 남은 상태에서 석탑을 중수하고, 통도사를 모방하여 석탑 앞에 법당(금강계단)과 예불소인 향로전을 건립했다. 이런 기록을 보면 18세기까지 석탑은 금당과는 별도의 영역을 이루었고, 전방에 법당, 향로전을 지을 만큼 공간이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석탑 전방 구역의 발굴조사에도 18세기에 지은 향로전으로 추정되는 건물지와 담장이 확인되어 이를 일부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따라서 법광사의 석탑과 금당의 배치는 창건기 이후로 9세기대 중심사역이 이동할 때 석탑을 이건하여 사리봉안과 함께 당시 왕실 원당처럼 석탑, 금당이 별도의 영역을 이룬 동당서탑배치형식의 탑원식 가람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가람배치는 1탑1금당이 주류로 금당 전방에 석탑이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동당서탑 배치형식의 탑원식 가람배치는 특별한 예라 할 수 있다. 법광사 연혁으로 창건기-중창기-쇠퇴기라는 일련의 과정으로 볼 때, 중창기에 창건기 사역에서 지금의 금당지 위치로 사역과 석탑을 옮겼다. 석탑을 이건할 때 금당지 전방이 아니라 다른 위치로 옮겨 별도의 영역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석탑 속에 사리를 봉안하게 된 목적과 의미(왕족의 명복이나 현세를 축원)는 금당과는 다른 차원의 숭앙과 영역이 필요했던 결과로 보여진다[5].
통일신라시대에 1탑1금당식이면서 금당지와 석탑이 병렬 또는 별도로 배치된 탑원식 가람배치의 예는 많지 않다[6]38). 고선사지(7세기)39), 황복사지(7세기 말), 나원리사지(8세기), 창림사지(8세기) 등이 있다[7]. 이중 창림사지, 황복사지의 건탑은 국왕 및 왕족이 주도한 원탑이다. 창림사 무구정탑원기」의 조성은 당시 분열되고 반목하였던 정치세력의 화해와 대민위무라는 국왕의 숨겨진 의도를 정토신앙이라는 불교사상으로 승화시킨 것이다[10]. 9세기대 1탑1금당으로 석탑과 불상이 동등한 존숭의 대상으로 유행할 때 동당서탑 배치형식의 탑원식 가람배치는 차별성이 뚜렷하다. 이는 국왕 및 왕족의 원당에 적용된 당시 하나의 배치유형일 가능성과 종교적 성향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결과일 수도 있다[7, 8]40). 1탑1금당식에 동당서탑의 가람 배치유형은 7∼8세기대에 주로 국왕 및 왕족의 원당에서 주로 확인된 점을 고려하면, 법광사도 왕실 원당임을 감안할 때 동당서탑 배치형식의 탑원식 가람배치였을 것으로 추론된다. 이런 가람배치의 변화는 창건기 이후 지금의 금당지 영역으로 사역 이전 및 석탑을 이건해 왕실 원당으로 중창기를 맞이한 9세기대에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석탑영역의 미발굴로 추후 발굴결과가 이루어지면 보다 명확히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4. 결론
그간 법광사에 관한 문헌연구와 지표조사에서는 석탑과 금당의 배치관계는 일반적인 1탑1금당의 변형으로 알려져 왔다. 최근에 7차에 걸친 발굴조사와 발굴중간보고서가 발간됨에 따라 석탑과 금당의 배치관계를 밝혀 볼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발굴중간보고서에 석탑과 금당의 배치에 관한 연구분석이 제시되지 않아 본 연구는 그간 선행연구와 금당지 영역의 발굴조사 결과를 분석해 석탑과 금당의 배치관계를 밝혀 보고자 했다.
발굴조사결과, 금당 앞에 석탑을 둔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1탑1금당의 배치형식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동당서탑 배치형식의 탑원식 가람배치로 추정된다. 현재 동당서탑 배치형식의 탑원식 가람배치는 고선사지, 창림사지, 황복사지, 나원리사지 등 7∼8세기 신라 왕경 외곽에 국왕 및 왕족의 원당으로 알려진 소수 예가 있다. 이들 배치형식에서 석탑은 금당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점, 석탑에 사리 및 명복기원 사리호 등을 봉안해 금당과 동등한 장엄성을 갖춘 공통점을 갖고 있다. 또 법광사 석탑처럼 9세기대 국왕 및 왕족의 원탑에만 확인되는 초층 탑신받침과 굽형괴임대의 독특한 장식을 갖고 있다. 이는 원탑 조성에 전담 조직 내지 특수 장인집단에만 전승된 고유한 조형장식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법광사는 9세기대 치열한 왕권쟁탈전 이후에 신무왕・문성왕・헌안왕대로 이어진 왕실의 안녕과 선대의 명복을 빌기 위한 왕실 원당으로 이전시기에 국왕 및 왕족의 원당과 원탑의 장엄법식, 배치유형을 계승한 것이라 하겠다. 즉「창림사 무구정탑원기」의 조성처럼 분열되고 반목하였던 정치세력의 화해와 왕실의 번영을 정토신앙이라는 불교사상으로 승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 가람의 보편적인 1탑1금당의 배치형식과는 다른 왕실 원당과 같이 특별한 가람에서만 적용된 독특한 배치 유형과 석탑의 장엄조식으로 차별화해 계승한 것이라 하겠다.
고려・조선시대에 들어 사역의 확장과 축소, 전각의 멸실과 건축이 반복되면서 가람배치에 변화도 많았다. 1747년에 금당과 대웅전만 남은 상태에 석탑을 중수하고, 통도사를 모방해 석탑 전방에 법당(금강계단)과 예배소인 향로전을 건립하는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9세기대 동당서탑 배치형식의 탑원식 가람배치는 조선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본 연구가 발굴조사를 분석했고, 석탑 구역이 미발굴지로 금번 석탑과 금당의 배치관계의 추론에는 한계가 있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추후 석탑 영역의 발굴조사와 추가 내용이 밝혀지면 그 결과에 따라 본 연구는 수정 보완하고자 한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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