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분야의 연구와 제도에서 나타나는 젠더 감수성
ⓒ 2020 KIEAE Journal
Abstract
On the domestic scale, research on architecture, urban and design fields from 2000 to today and the legal system were reviewed from a gender perspective. Previous studies indicate that gender sensitivity has been perceived as a narrow idea in the architecture and urban fields of Korea. In this paper, the change in scholarly trends and subjects on ‘Gender and Space’ was analyzed according to the expanded notion of gender sensitivity, and then the gap between the academic and the institutional practice was presented in order to propose the direction of the future research.
Selected 114 dissertations and journals among 7,198 papers searched by the keyword ‘Gender, Women’ and ‘Architecture, Urban’ were discussed in this research. Simultaneously, women policy of the central government and the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such as ‘Women Friendly City’ and the 5 domestic law such as 「National Land Planning and Utilization Act」 and 「Framework Act on Building」 were examined from the gender viewpoint.
For the last 20 years, the scope and subject of research on ‘Gender and Space’ have been considerably widened in the architecture and urban fields although a quantity of the papers has been slightly decreased since 2015. Research shows relatively higher gender sensitivity than the present system that still considers women as the object of protection rather than the independent subject. This paper suggests the need for the legal system to achieve gender equality in space that is based on continuous research to improve a biased understanding of gender issues.
Keywords:
Gender Sensitivity, Women, Architectural Research, Architectural Institution, Women Policy키워드:
젠더 감수성, 여성, 건축연구, 건축제도, 여성정책1. 서론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민주화운동에서 최근 여성운동에 이르기까지 성차별을 근절하고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과 제도 마련이 계속되고 있다. 성폭력특별법(1994), 성매매방지법(2004), 호주제 폐지(2005), 양성평등기본법(2014) 등 여성정책이 법제화되어 왔고, 그 결과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 젠더 감수성은 사회 전반에 걸쳐 주요 가치로 부상했다[1]. 성인지 감수성으로 번역되는 젠더 감수성의 사전적 의미는 ‘성별 간의 불균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갖춰 일상생활 속에서의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과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해 낼 대안을 찾아내는 능력’을 포함한다[2]. 젠더감수성이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국내 정책 및 제도에 활용되면서, 학술연구와 산업에서도 여성은 기존 소비자 또는 수용자로서의 역할을 넘어 생산자 또는 유통자로서 인정받으며, 다양한 여성의 역할과 활동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여성정책의 제도화를 통해 노골적인 성차별은 감소하였지만, 일상생활과 개인의 인식에 남아있는 성차별주의와 성 고정관념은 여전히 내밀하게 나타난다. 전지구적인 성주류화1) 흐름에 발맞추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분법적 사고와 공간구조에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한 젠더관계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젠더 감수성에 대한 이해와 문제인식이 필요하다. 젠더 감수성에 기초하지 못한 정책적 지원은 페미니즘이나 젠더 이슈에 대한 오해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학, 페미니즘 사회지리학을 포함한 사회과학 분야의 젠더와 공간 연구는 이분법적 사고와 가부장제 개념에 따라 나타나는 성차별, 성범죄, 도시의 이분화된 공간적 분리 등 다양한 사회문제와 젠더 감수성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다뤄왔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건축ㆍ도시ㆍ디자인 연구나 제도와 접목되는 사례는 한정적이다. 따라서 다수의 연구가 젠더화된 구조적 시스템의 한계나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물리적 측면만을 분석하는 한계가 있었다. 그 결과 여성정책의 대상과 방법이 가시적 성과 위주로 한정되어 공간과 젠더 문제의 본질을 다루지 못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3].
건축이나 도시계획 상의 물리적 개선만으로는 본질적인 문제 해결이 되지 않으며 젠더 문제에 대한 빈곤한 인식은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개선을 가져온다[4]. 젠더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조합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어떤 공간에서 나타나는 ‘현상 그 자체’보다는 ‘어떠한 방식’으로 불평등한 젠더 관계가 재구성되는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연구와 함께 경제ㆍ사회ㆍ문화ㆍ정치적 구조와 맥락에 대한 연구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5]. 따라서 본 논문은 젠더 관점에서 국내 건축ㆍ도시ㆍ디자인 분야의 이론연구와 제도적 실천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연구와 현행 제도가 인식하는 젠더 감수성의 차이를 밝혀 향후 연구방향을 제안하고자 한다.
1.2. 연구의 방법 및 범위
본 논문은 2000년대 이후 국내 건축ㆍ도시ㆍ디자인 분야 연구와 여성ㆍ젠더 및 공간 관련 제도를 살펴보기 위해 문헌조사와 제도 및 법령 조사를 수행하였다. 디자인 분야는 실내디자인, 가구디자인, 제품디자인과 같은 건축공간과 관련된 분야로 한정하였으며, 도시연구 중 (도시)사회지리학의 공간론 연구는 이론적 고찰로 참고하되 연구대상에서는 제외하였다.
먼저 문헌조사는 젠더와 공간이라는 두 개념을 포함하면서도 본 연구내용에 적합한 자료를 선택하기 위하여, ‘젠더, 여성’과 ‘건축, 도시’라는 4가지 키워드를 교차 검색하여 7,198편의 자료를 검색하였다. 검색된 자료 중 본 연구와 관련성이 낮다고 판단되는 연구를 제외하고 114편을 연구대상으로 살펴보았다. 관련성이 낮다고 판단된 연구는 1) 산후조리원, 여성의류 VMD처럼 건물 또는 공간 특성상 제목에 ‘여성’이 들어갔지만 젠더 및 여성에 대한 연구가 아닌 자료 2) 제도 관련 논문 중 도시계획, 공간 디자인 관련 내용보다 정책수립ㆍ집행과 관련된 정치행정 관련 논문 3) 여성소설, 영화, 그림 등을 통한 근대 도시공간 재현과 관련한 문학 및 예술 연구 4) 구체적 사례보다는 추상적 공간 개념으로 도시가 설정된 (도시)사회지리학 관련 연구 5) 칼럼, 기고문, 사업보고서 형태의 자료 6) 키워드 검색에서 중복 검색된 연구 이다.
제도 및 공공 프로젝트는 대표적으로 중앙정부와 서울시 정책을 분석하였다. 제도의 경우 건축ㆍ도시 또는 일상 공간과 관련하여 2009년부터 시행된 ‘여성친화도시’와 서울시의 ‘여성이 행복한 도시 프로젝트’와 그 후 최근 정책 동향을 살펴보았다. 또한, 도시에서 공간조성을 위한 「국토계획법」과「건축기본법」, 편의시설 조성을 위한「장애인등편의법」, 이동 공간을 위한 「교통약자법」과 「보행안전법」을 포함하였다.
2. 젠더와 젠더 감수성
2.1. 젠더 개념의 등장과 변화
젠더(gender)는 생물학적 성(sex)의 개념과 달리 사회적인 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 문화적으로 여성과 남성에게 기대되는 역할ㆍ 태도ㆍ행동ㆍ기질 등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젠더’ 의미는 영미권의 1970년대 페미니스트 연구에서 처음 등장하여 여성학, 인류학을 시작으로 점차 다른 사회과학 분야에 정착하였다. 주로 자유주의, 급진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네 가지 관점으로 분류되는 페미니스트 연구는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남성지배적 사회에서 여성이 종속되고 대상화됨을 밝혀왔다. 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여성이라는 단일한 범주를 설정하여 실제 삶 속의 다양한 여성들의 위치와 차이를 간과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6].
1960년대 우먼리브 운동부터 시작된 초기 연구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에 기초하여 주로 대중문화에 나타나는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분석이 주로 이루어졌다. 1970년대까지 이어진 이 연구들은 여성이 노동자로서 노동시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현실과는 달리 미디어가 여전히 아내나 어머니라는 성역할 스테레오타입을 유지하며, 대중들에게 기존의 지배적인 사회적 가치를 반영하려 한다는 점을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에서 나타나는 여성은 미디어의 이미지에 저항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자로 제한되는 한계를 가졌다. 이를 보완하여 1980년대에는 여성을 의미생산의 주체로서 드러내고 기존문화의 대안으로서 여성문화를 제안하는 연구들이 이루어졌다[7].
이후 연구자들은 탈구조주의에 기초하여 해석된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문화가 다양한 재현, 이미지, 의미가 교차하는 담론적 지형 속에서 여성의 의미를 선택적으로 구성하고 그 이미지를 통해 ‘여성’이라는 범주를 생산해 내는 방식에 주목했다. 이는 여성의 몸을 가진 한 명의 개인이 어머니, 노동자, 시민, 레즈비언 등 다중적인 정체성을 가진 주체임을 가능하게 하고 여성들 간의 차이를 포용할 수 있게 했다. 이처럼 여성과 남성이 고정되지 않은 정체성으로 간주되면서, ‘젠더’는 유동하는 정체성의 경계를 임시로 고정하는 인식의 틀로서 더욱 중요한 범주가 되었다. 이를 통해 여성주체는 실천에 의해 변화해 왔고, 변화해 갈 가능성이 있는 행위능력(Agency)이 있는 주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능성들은 2000년대 들어서, 젠더 행하기(doing gender)와 젠더 체계(gender system)2)의 논의로 발전하였다. 개인이 여성성과 남성성의 규범에 벗어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성 정체성이 유지되는 것은 젠더 행하기의 결과이며, 이는 젠더 체계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 변화한다는 점이 새롭게 주장되었다. 이러한 젠더 개념의 확장은 연구 대상을 여성에서 남성으로, 그 후에는 다양한 차이의 가치를 논하는 것으로 연구 주제와 범주를 확장시켰다[8].
젠더 개념이 단순히 남성과 여성을 넘어 하나의 범주로서 작동함에 따라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연구 영역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젠더는 다른 사회적 규범이나 권력관계처럼 우리의 일상생활과 사회현상 전반에 보이지 않게 자리해 개인의 행동과 생각에 작용한다. 에드워드 소자의 사회공간 변증법(socio-spatial dialectic)에 따르면, 도시 공간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조정되기 때문에 그 공간의 특성은 거주자의 가치와 필요를 반영한다. 그리고 그 거주자는 주변의 물리적 환경과 사람들에게 순응하는 지속적인 쌍방향의 과정에 있다[9]. 이는 젠더와 젠더 체계가 건축과 도시공간에 영향을 미치고, 동시에 공간 역시 젠더가 (재)생산되고 변형되는 과정에 관여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젠더 개념과 시각을 통해 건축과 도시공간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2.2. 젠더 감수성
전통적으로 성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성으로 구분하는 이원성, 두 성이 서로 완전히 상반된 특성을 보인다는 양극성,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위계성을 갖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젠더 개념의 등장으로 성별에 따른 특성은 사회 문화적으로 형성되고 후천적으로 학습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별에 기인한 차별이나 기대역할 등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인식되기 시작했다[10]. 젠더는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차이와 그에 따른 권력관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 폭넓게 여성과 남성을 체계적으로 구조화시켜 서로 다른 것으로 범주화하는 과정, 규범, 문화, 상징체계 등에 문제를 제기한다. 개인은 사회와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몸을 통해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젠더를 경험하고 인식하지만,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젠더 규범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개인을 비정상적인 타자로 규정하여 차별과 사회문제를 가져온다. 따라서 체계적으로 구조화된 사회를 정치적, 사회적으로 분석하여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젠더는 역동적이고 전환적인 범주로 이해되어야 한다[11].
성에 대한 개념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적 인식과 도시공간은 젠더 이분법적 구조에 의해 작동한다[12]. 많은 사람들이 추상적인 개념의 성평등 또는 성차별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만연한 젠더 이슈나 사건에는 무관심하거나 사회생활 중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실수 또는 관습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문제의 대안으로 제기된 개념 중 하나가 젠더 감수성이다. 젠더 관점(gender perspective)은 우리 삶의 조건에 구조화되어 있는 성에 따른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으로 초래되는 문제와 영향에 대해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구성해 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젠더 감수성(gender sensitivity)은 젠더 관점으로 성별화된 상황이 차별적 행동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감각하는 것이다[13]. 그러나 해외에서 gender sensitivity가 ‘성별 불평등과 젠더 이슈에 대한 감지 능력’으로 정의되는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성인지성’이나 ‘성인지력’으로 번역되어 주로 정책과 관련된 것으로 한정되며 성주류화 개념의 형식적 절차만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14].
본 논문에서는 젠더 감수성을 기존에 국내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다루었던 성인지성 개념과 함께 우리 일상공간을 형성하는 건축과 도시에서 성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기초적인 의식으로 인식한다. 이를 통해 건축ㆍ도시ㆍ디자인 분야 연구와 제도에서 나타나는 젠더 감수성과 두 영역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공백에 초점을 둔다.
3. 건축ㆍ도시ㆍ디자인과 젠더 감수성
3.1 연구 분야
오랜 시간 동안 건축과 도시는 성별 문제와는 관계가 없는 젠더 중립적인 영역으로 이해되어 왔다.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1970년대 이후 사회학, 지리학, 정치과학 등 여러 영역에서 페미니스트 관점이 관철되어 세계를 보는 새로운 방법과 사회ㆍ정치ㆍ경제적 관계를 재정립해 온 반면에, 학문적 분야로서 건축과 도시에서 젠더 불평등 문제, 젠더와 페미니스트 이론에 대한 인식 등은 상대적으로 뒤늦게 정착하였다. 건축 및 도시 분야와 가까운 지리학은 일찍이 젠더, 페미니즘 논쟁을 수용하여 공간과 젠더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진행해 왔다. 젠더와 공간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인류학, 문화적 연구, 예술 역사, 영화 이론, 정신 분석학, 철학 등과의 학제간 연구로 공간의 재현, 공간이 담고 있는 은유 등을 탐구한다[15].
지리학에서 젠더와 공간 연구는 철학자이자 도시학자 르페브르의 ‘사회적 공간은 사회적 생산물’이라는 공간에 대한 이해를 받아들여, 일상 공간은 사회적 관계가 구성되고 해체되는 관계적 공간으로 젠더, 계급, 나이, 인종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가 응축되어 나타난다고 보았다[16]. 특히, 페미니스트 지리학은 사회적 경험이 다양해지고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한 인식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남성에 대해 특정한 특성과 역할을 규정하는 규범이 여전하며, 일터나 가정을 비롯한 일상생활의 주요한 공간들이 젠더화되어 있다는 것을 밝혔다[17]. 뿐만 아니라 공적공간에서 생산 활동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남성 중심으로 도시공간이 구성됨에 따라 사적 공간에서 돌봄 활동을 하는 여성은 도시공간을 사용하고 생산하는데 있어서 공간에 대한 충분한 권리를 갖지 못하고 있음을 주지했다[18]. 이러한 지리학 분야의 젠더와 공간에 대한 연구는 건축과 도시 연구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1970년대부터 서구 페미니스트 학자들에 의해 건축과 도시공간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비가시성과 연구와 담론에서의 여성 제외가 논해졌다. 지속적인 페미니즘 운동과 연구로 근대문명의 남성중심성이 밝혀지고 상당부분 해체되었지만 여전히 건축과 도시에 관한 담론은 젠더 중립적으로 구성되고 있으며, 주요 논의에서는 젠더관점이 결여되거나 축소된다. 특히, 제1세계에서 제도적 성평등이 이루어지면서 일부 여성들의 해방이 모든 여성의 승리로 오인되었다. 그러나 제1세계와 제3세계를 막론하고 많은 수의 여성들은 여전히 권력관계와 자본주의 사회의 맨 밑바닥에 위치하고 있으며, 물리적 환경인 공공공간부터 학문영역에 이르기까지 소외되고 있다. 이처럼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다양한 여성의 ‘정체성’과 ‘경험’을 고려한 젠더와 공간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며, ‘여성’의 억압과 소외를 밝히는 것을 넘어 ‘젠더’의 관점에서 도시와 문명의 구축부터 지식ㆍ담론생산까지 지배적 주체에 의해 결정되고 그것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모두에게 강제적으로 적용되어 온 권력관계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밝히고 개선해야 한다[19].
이처럼 도시를 만들어온 개념과 도시 공간은 젠더 이분법적 특성에 기인하고 또 그것을 더 공고히 해왔다. 문제는 건축 또는 도시공간의 구조와 배치 그리고 기능에 따라 거주자 삶의 방식과 경험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 항에서는 국내 건축ㆍ도시ㆍ디자인 연구에서 어떠한 젠더 관련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얼마나 젠더 감수성에 부응하여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건축을 포함한 디자인 분야의 페미니스트 연구가 영미권에서 1974년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 국내에서는 1993년에 관련 연구가 등장하였다[20]. 건축ㆍ도시ㆍ디자인분야 국내 학술지 및 학위논문에서 젠더를 주제로 한 연구는 2000년부터 2019년까지 총 114건이다. 1990년대에도 (도시)사회지리학 뿐만 아니라 의상디자인학을 위주로 젠더나 여성 주제가 다루어졌지만, 국내 건축 및 도시 분야 연구에서는 2000년에 처음으로 관련 주제로 학술논문과 학위논문이 발표되었다. 4건에서 동일 주제를 학위논문과 학술지 또는 학술발표대회에 게재한 경우가 있지만, 논문 진행과정에서 내용 수정 또는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별개의 데이터로 집계하였다.
2004년과 2005년에 동일 주제의 학위논문을 학술발표와 학술지에 중복 게재한 경우를 제외하면, Table 1.에서 나타나듯 2010년부터 젠더 관련 논문이 두드러지게 증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연평균 2.9건의 연구가 발표되던 것이 2010년 이후 연평균 8.5건으로 증가한다. 이는 1990년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젠더 거버넌스가 수행되고 성 주류화 실현을 위해 여성전담기구가 설치되면서 여성운동이 활발해지고[21], 2000년대 국내외 타 분야에서 젠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됨에 따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전환되고 젠더 중립적이던 건축과 도시 분야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09년부터 여성가족부가 여성친화도시 사업을 추진함에 따라 2010년대부터 그에 대한 사후 제도평가와 개선방안에 대한 연구가 증가한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젠더 감수성(gender sensitivity)이 주로 성인지성의 개념으로 제도와 연관되어 제한적으로 이해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전체 114건의 연구 중 연구 분야별 건수는 도시 52건, 건축 41건, 건축+도시 14건, 디자인 7건순으로 높았다. Table 2.와 Fig. 1.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2000년대 초반에는 젠더 관점에서 본 주택, 백화점 등 건축공간변화(4건)나 여대생, 주부를 대상으로 한 이용자 분석(5건)이 건축 분야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최윤경이 가족이라는 사회 제도 내에서 변화해온 여성의 위상과 위치를 공간구문론을 사용하여 주택의 공간적 변화를 분석하여 설명하였으며[22], 김항아ㆍ강미선이 1980년부터 2003년까지 여성지에 나타난 주거공간을 분석하여 대중매체가 왜곡된 젠더 개념으로 주거공간을 규정하고 있음을 밝혔다[23]. 뒤이어 김종희ㆍ김영찬이 1960~70년대 여성지에 나타난 근대적 주거공간과 주거담론이 당시 여성의 근대적 경험과 정체성은 물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영향을 분석했다[24]. 하지만 2010년대부터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여성친화도시 정책 등이 시행되면서 제도의 내용 및 지표 분석(36건)과 젠더 관점에서 본 이분화된 도시구조 등 도시공간변화(7건)에 대한 도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대표적으로 송향숙은 초기 국내외 여성친화도시 정책 사례 분석을 통해 여성 공간 사용자가 사회적 동반자로서 인식되지 못해 발생하는 도시공간의 부분적 개선을 지적하고 요인분석을 사용하여 안전요인, 주거안정, 돌봄 등 여성친화계획 요소 6가지를 제안했다[25]. 이후에도 여성정책과 실제 도시 및 주거 공간의 불일치를 연구했다. 장미현은 우리나라 성주류화 정책 도구들이 도시 및 건축 분야의 특수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을 밝히고, 도시 및 건축 공간의 성별관련성을 드러낼 수 있는 성인지 분석모형을 제안하였으며[26], 공공시설 및 공공주택, 도시 및 건축 정책에 대한 성인지적 분석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건축 및 도시 연구에서 여성은 이용자와 생산자로서 그 대상이 된다. 이용자 분석에 대한 연구는 2000년대 초반에 주로 여대생, 주부를 대상으로 주거공간에 대한 영향, 수요분석이 이루어지던 것이 2015년 이후에는 성별에 따라 건축물 수요 분석, 도시공간 이용 분석으로 확장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는 기존에 주부와 주거공간이라는 성역할과 이분법적 공간 분리에 한해 이루어지던 이용자 분석이 남녀 청년, 1인 가구, 여성노인, 직장여성 등으로 그 대상을 확대하고 여성공간에 대한 범위 역시 도시공간의 이용으로 넓힌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석사학위논문을 비교해 보면, 2000년 차은아가 연구대상을 설명함에 있어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중심이 되지 못한 도시 주거 공간의 소외된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대학 주변 여대생의 하숙, 자취 공간과 생활 실태를 살펴봄으로써 여성의 공간 문화를 조명하고자 한다.”고 설명한 반면에[27], 2019년 조규원은 “청년 1인 가구가 거주지 선택 시 고려하는 주거 환경요소가 성별로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남녀 1인가구를 대상으로 젠더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28]. 공간과 젠더 연구 초기에 주목받지 못한 여성을 연구의 대상으로 진입시키는 것이 중요했다면, 최근 연구는 성별에 따른 차이를 분석하여 문제점과 대안을 구체화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연구 초기부터 여성 1인 가구의 주요 쟁점이 주거환경의 안전성에 있음이 지적되고 있지만 현재까지도 사회가 주거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연구 대상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지만 국내 연구는 여전히 2~30대 젊은 여성, 주부 등을 주요 대상으로 하고 있어 성소수자, 이주여성, 여성노인, 임산부, 여성장애인 등 연구대상의 세대별, 가구유형별, 특이사항에 따른 세분화된 연구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생산자로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연구는 과거 여성 건축가 및 예술가에 대한 재조명 연구가 6건, 현재 여성인력에 대한 분석이 5건으로 나타난다. 2005~6년에 이란표는 모더니즘 여성건축가와 현대 여성건축가를 재조명하는 논문 3건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건축 담론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중요한 개념들이 남성중심주의의 지배 하에서 발전되어온 전통적인 이론들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건축 영역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구별 이전에 보다 근본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논의의 기반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29]. 최근에는 현재 여성전문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하여, 김명희가 여성건축가를 대상으로 일과 삶의 균형과 조직몰입 및 직무만족의 관계를 주관적 경력성공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하여 설명하였다. 이를 통해 건축을 전공하는 여성이 꾸준히 증가하지만 이탈하는 인력 역시 많은 건축계의 구조를 밝히고자 하였다[30]. 황현정은 경력단절 여성건축가가 학습된 성역할과 건축사사무소 근무환경특성 상 경력의 재진입이 어려움을 밝히고 업계에 재진입할 수는 대안으로 유연근무제의 시스템 구축과 관리자 인식개선을 주장했다[31]. 그럼에도 건축 및 도시 분야의 여성 전문가에 대한 연구의 다양성에 한계가 있어 향후 연구의 질적ㆍ양적 성장이 요구된다.
건축설계특성을 주제로 한 연구에서는 기능주의, 합리주의에 의한 근대건축의 남성적 디자인에 대한 현대건축의 대안으로서 여성성을 논한 연구가 9건으로 가장 많았다. 그 뒤를 이어 아돌프 로스, 르 꼬르뷔지에, SANAA, 자하 하디드와 같은 근ㆍ현대 건축가의 건축 작품을 대상으로 건축에서 나타나는 성적 표현방식과 특성, 페미니즘적 공간특성 등에 대한 연구가 6건이었다. 건축공간과 여성성은 2000년대 초중반부터 주요한 연구주제로 나타나고 있으나, 당시부터 최근 논문에 이르기까지 여성성에 대한 발전된 정의 없이 새로운 건축 사례들을 분석하는 것에 그쳐 아쉽다. 이는 2004년에 발표된 황태주의 논문과 2017년에 발표된 장정제의 논문, 2018년에 발표된 김형자ㆍ최익서의 논문이 모두 동일하게 마가렛 케네디(Margrit I. Kennedy)의 ‘건축에서의 여성적 원리’[32]를 이론적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으로 예상된다. 케네디의 이론이 환경설계 분야의 여성적 접근방식에 관한 연구의 시초이자 중요한 터닝 포인트일 수는 있으나, 1981년 발표된 저술에서 논의된 여성성과 디자인 특성이 오늘날의 젠더 감수성에서 유효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건축설계특성에 대한 연구가 현시점의 젠더 감수성과 더욱 부합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여성성 개념, 여성적 코드를 넘어 적극적인 주체로서의 여성성 개념을 확립하여야 한다. 그리고 여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젠더 주체가 주장하는 실생활의 문제와 요구사항이 반영된 공간디자인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여성이 드러나는 것을 넘어 사회의 다양한 주체의 참여와 연대를 이끌어내어 성평등의 가치를 확장해 가는 공간이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3.2. 제도 분야
전 세계적으로 여성정책 패러다임은 발전 모델과 젠더를 결합한 발전 속의 여성 통합(Women in Development, WID, 1975~1985)에서 젠더와 발전(Gender And Development, GAD, 1985~1995)으로, 최근에는 성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GM, 1995~)로 변화해 왔다. 각각의 패러다임은 보호(protection), 평등(equality), 성평등(gender equality)의 키워드로 확인할 수 있다. 보호 패러다임은 남녀 간 성차에 따라 여성을 보호함으로서 남녀평등이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평등 패러다임은 남녀 간 생물학적 기능보다는 정책ㆍ사회ㆍ정치적으로 남녀에게 동일한 기회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성평등 패러다임은 성별차이에 근거한 관행 및 제도를 비판하며, 정책적 의사결정, 생산노동, 재생산노동 등 모든 영역에 남녀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회시스템을 구축할 것을 지향하는 관점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생활세계에 기반을 둔 성주류화(GM)가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면서 여성을 넘어 양성을 대상으로 도시, 마을, 가정을 포함한 일상생활 속의 성평등을 실현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33].
우리나라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성평등 실현을 위하여 「남녀고용평등법(1987)」을 시작으로 「여성발전기본법(1995)」, 「양성평등기본법(2014)」등을 제ㆍ개정해왔다. 국제적 여성정책 패러다임에 따라 여성정책을 도입하고 있지만, gender 개념을 1:1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가 없어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면서 여러 가지 혼란과 오해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최근까지도 여성정책과 젠더정책이 다른 것으로 이해되고 여성운동에 대해서도 왜곡된 인식이 형성되었다. 여성주의 연구자들은 여성정책의 목표가 여성의 기본적 인권, 남녀 동권의 실현, 남녀 간 위계적 권력관계의 변화, 전략적 젠더 이해(interests)의 실현 등 차별과 불평등 해소를 통한 평등 달성이라는 정치적 의제에 있음을 밝혀 왔지만, 현실은 여전히 정책의 ‘수혜자 또는 대상으로서 (생물학적)여성’에 주된 방점이 맞추어져 있다[34]. 성평등의 문제는 남성이 무엇을 양보하거나 여성이 더 발전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정치ㆍ경제ㆍ사회문화적 구조와 시스템을 재편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 저출산, 다문화, 고령화 등 다변화하는 사회의 문제들과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을 함께 통합적으로 고려한 여성정책이 수립될 필요가 있다.
1995년 북경 세계여성대회에서 성주류화가 여성정책의 공식적인 전략으로 채택되면서 도시 및 건축 정책에서도 젠더 관점이 반영되고 있다[35]. 여성가족부는 도시와 일상공간에서의 문제를 젠더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2009년부터 여성친화도시 정책을 시행해오고 있다. 여성친화도시는 1970년대 여성들이 도시의 안전성, 접근성, 편리성, 쾌적성을 요구했던 ‘안전한 도시’ 캠페인에서 시작하여 1994년 ‘도시여성을 위한 유럽헌장3)’을 통해 지속되어 왔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여성친화도시 정책 역시 도시공간에서 여성의 안전성, 접근성, 편리성, 쾌적성 제고를 위해 ‘형평성’, ‘돌봄’, ‘친환경’, ‘소통’의 4가지 핵심 가치를 제시하고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36]. 그러나 여성친화도시 조성을 위한 생활환경 개선 사업 대부분이 기존 타 사업의 내용을 그대로 적용하거나 표면적인 성과위주에 그치고 있다. CCTV 설치, 여성 및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 추가설치 등이 도시 공간의 안전성과 편리성 확보를 위해 필요한 사업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도시계획 과정에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고 역량을 증진시켜 경제활동, 교육, 돌봄, 정책참여 등 도시 공간에서의 성평등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사업내용과 방법이 제시될 필요가 있다[37].
서울시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중앙정부의 여성정책과는 별도로 시정 전반에 여성의 경험을 반영한 최초의 지역 여성정책인 「여성이 행복한 도시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이는 여성이 일상의 삶에서 체감하는 도시 여성정책을 수립하고 여성이 자문단, 프로슈머단, 시민참여 거버넌스 등의 역할로 참여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는 프로젝트였다. 이를 통해 서울시는 2010년 UN공공행정대상을 수상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지만, 여행 프로젝트의 핵심 사업 중 다수가 수행된 도로, 교통, 주택, 건축, 환경 영역 등의 담당자들은 성인지성이 낮은 편으로 평가되었다[38]. 그리고 일부 사업들이 여전히 여성을 사적공간에 한정시켜 여성성(모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시켰으며,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지원책은 미비하고 취ㆍ창업을 위한 교육마저도 아동 및 노인 돌보미, 미용, 네일아트 등으로 구성되어 성 고정관념을 고착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39]. 최근 서울시는 여성가족정책실(6담당관), 여성가족재단(출연기관), 아동복지센터(사업소)를 통해 ‘여성ㆍ가족ㆍ외국인주민과 함께하는 서울’을 정책목표로 삼아 다양한 대상에게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하고 있다4).
구체적으로 공간을 다루는 국내의 법을 살펴보면, 「국토계획법」은 국민을 대상으로(제1조) 주민의 편리하고 쾌적한 삶을 위한 도시의 지속가능성과 생활인프라 수준을 평가한다(제3조의2). 건축헌법이라 할 수 있는 「건축기본법」은 제7조제2항에서 장애인ㆍ노약자ㆍ임산부를 배려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국민의 안전ㆍ건강 및 복지에 직접 관련된 생활공간의 조성(제2조제2항)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편의시설의 조성과 관련된 「장애인등편의법」은 장애인ㆍ노인ㆍ임산부를 공간이용의 대표적인 취약 계층으로 보고 일상생활에서 안전하고 편리하게 시설과 설비를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제1조). 이동 공간과 관련된 「교통약자법」은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를 동반한 사람, 어린이 등을 교통약자로 보고 이들의 이동에 있어서 안전성과 편리성을 확보하고자 한다(제1조, 제2조). 「보행안전법」은 유모차와 보행보조용 의자차를 포함한 보행자의 안전하고 편리한 보행환경 조성을 목적으로 한다(제1조, 제2조).
「국토계획법」과 「건축기본법」은 도시와 건축의 계획과 정책에 대해 상위의 목적성과 주요 가치를 선언하고, 젠더 중립적으로 모든 조항에 대해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한다. 「장애인등편의법」은 접근권에 대해 장애인등과 장애인 등이 아닌 사람들(제4조)로 이분법적으로 그 대상을 구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교통약자법」이 이동권에 대해 교통약자가 교통약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용하는 모든 교통수단, 시설, 도로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제3조)과 비슷하지만, 교통약자의 정의에서 ‘영유아를 동반한 사람’을 여성으로 한정하지 않아 돌봄 활동의 주체를 확장하여 해석한 것을 볼 수 있다. 「보행안전법」은 이에 한걸음 더 나아가 보행권에 대해 모든 국민이 ‘장애, 성별, 나이, 종교, 사회적 신분 또는 경제적ㆍ지역적 사정 등’에 따라 보행관련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제3조). 이는 도시와 건축 관련 법령 중 ‘성별’을 유일하게 조항에 사용한 법으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특정 집단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해석하지 않는다[40].
「공공디자인법」은 공공디자인사업에서 연령, 성별, 장애여부, 국적 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고 쾌적하게 환경을 이용할 수 있는 디자인을 지향하고 있고(제10조제2항), 2009년 이후 사회적 약자들의 공간 접근성과 편리성 향상을 위해 ‘장벽 없는 건축 설계(Barrier Free)’와 ‘범죄예방 환경설계(CPTED)’가 법제화되었지만, 대부분 보편적인 공간이 성평등한 공간과 동일하게 이해되고 여전히 여성이 공간 계획 주체보다는 보호받거나 배려되어야 하는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한계를 보여 준다[41]. 이처럼 도시 및 건축 공간과 관련된 국내 제도 대부분은 아직까지 젠더 중립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4. 결론
본 연구는 일부 디자인 분야를 포함한 국내 건축 및 도시 연구와 제도를 젠더 관점에서 살펴보고, 두 영역의 젠더 감수성간의 공백을 검토하고자 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젠더 관점의 건축 및 도시연구가 거시적 시점의 입체적인 연구로 확대되고 있지만, 연구의 수와 인력의 확충이 필요하다. 2000년부터 2019년까지 연구들을 검토한 결과, 연구대상이 젊은 여성에서 남녀 청년, 여성 노인 등으로 확대되는 추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연구 범위 역시 여성 생활권에 대하여 초기에 주택이나 백화점 위주의 제한적인 접근에서 마을, 도시 단위로 확대되었다. 더불어 공간 생산자로서 여성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과거 여성 건축가나 디자이너를 재평가하고 오늘날 여성 전문가의 역할과 역량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연구 대상, 범위, 주제가 확대된 성과에 비해, 소수의 연구진만이 젠더 관점에서 공간연구를 지속하고 있어 새로운 연구 인력의 양성과 지원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아직 공간계획에 있어서 성평등 가치 구현이 미비한 현 상황을 고려하면 연구의 질적인 성장과 함께 양적인 성장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2) 주체적인 여성의 여성성을 정의할 수 있는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최근 들어 여성들의 젠더 감수성이 높아지고 여성의 사회적ㆍ경제적 지위와 역할이 확대되고 있지만, 이러한 활동을 뒷받침하는 도시 및 건축 공간계획은 부족하다. 또한, 성차별, 성적 권력체계, 젠더이슈 등 문제점을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개인들의 일상생활에서는 존재하지 않거나 관습정도로 여겨 젠더 감수성과 여성정책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합의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보호하고 배려해야 할 여성이 아닌 ‘적극적인 주체로서 여성’의 여성성을 확립하고 기존 인식을 개선할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양성 평등한 공간을 조성할 수 있는 제도가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3) 제도의 대상에 대하여 성별 이용 특성 및 요구를 고려한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건축과 도시 연구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여성친화도시’로 대표되는 정책 및 제도에 관한 연구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내법은 그 적용 대상에 있어서 젠더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이분법적 구분을 함으로서 성별 이용 특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 실제로 안전한 귀갓길 조성이나 주차장 등 편의시설 확충은 남녀 모두에게 필요한 복지임에도 수혜자를 ‘여성’으로 한정하여, 일각에서는 남성에게 위화감과 역차별을 느끼게 한다는 우려가 있다[42]. 법령이 규정하고 있는 공간계획의 내용도 주로 시설 설치 규모나 재료, 치수 등의 시설 및 설비 기준으로 한정되어 실제 이용자의 이용패턴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 비록 법이나 정책이 변화하기 어려운 영역이긴 하지만, 건축 및 도시 연구의 변화에 비해 관련 제도는 여전히 젠더 중립적 영역으로 확고하다. 여성과 남성, 나아가 성소수자 등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평등한 공간계획을 위해 제도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4) 정치적ㆍ행정적 논리에서 벗어나 가치관, 의식의 변화와 같은 비가시적 성과를 위한 제도와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젠더와 공간에 대한 연구가 다양해지고 제도 역시 지속적으로 개선되고는 있지만, 연구 분야에서 다루는 넓은 의미의 젠더 감수성과 그 연구 성과가 여성정책이나 제도와 성공적으로 접목되지는 못한 실정이다. 도시와 건축 분야는 물리적 형태를 위주로 하는 사고와 체계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결과 여성 정책도 가시적인 성과 위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일상생활이나 공간에서 나타나는 젠더 불평등과 그 재생산 메커니즘에 다가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43]. 정책에 있어서 젠더 감수성 개념이 확장되어 이해될 필요가 있으며, 단기적 효과와 변화를 위한 정책과 함께 정권이나 단체장의 임기와 별개로 장기적 성과(의식 변화 등)를 내는 계획과 운영주체가 필요하다.
본 연구는 국내 건축ㆍ도시ㆍ디자인 분야 연구와 제도를 젠더 관점에서 살펴봄으로서, 변화하는 연구 경향을 파악하고 제도와 정책에서 나타나는 성인지적 한계를 고찰하였다. 그러나 자료 조사 과정에서 일부 자료가 누락되거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등 여성연구를 주도하는 다양한 단체 및 기관의 사업 보고서 등을 모두 살펴보지 못하였고, 아직까지는 국내 연구가 시작 단계라는 점에서 비교분석 샘플의 양이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향후 자료의 양적 보완을 통해 보다 정확하고 유의미한 통계결과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한편, 제도와 법령 분석에 있어서도 모든 세부사항을 상세 비교ㆍ분석하지 못한 한계점 역시 보완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본 논문은 ‘젠더와 건축ㆍ도시 공간’ 연구의 경향을 알아보고 제도와의 공백을 확인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향후 논문 추출 범위와 방식, 제도와 정책에 대한 세부 검토 등 연구 보완을 통해 주기적으로 연구와 제도의 변화와 상호관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19년도 중앙대학교 CAU GRS 지원에 의하여 작성되었음.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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